시집에서 읽은 시

페어링/ 이영옥

검지 정숙자 2022. 11. 15. 00:53

 

    페어링

 

    이영옥

 

 

  우리가 찾던 길을 우리가 막고 있었습니다

  초조했던 바늘 끝은 잊어버립시다

  여기 도착하기까지 꼬박 한 세기가 걸렸습니다

 

  지금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찌릿찌릿한 당신 심장은 언제 출발한 예감입니까

 

  꽃나무는 기원전에서부터 숨죽여 걸어왔습니다

  신이 이끈 이곳에서 환각처럼 피어납니다

 

  셀 수도 없는 끝을 지나온 우리는

  얼음으로 동기화되왔다가

  봄 공기가 얼굴을 만지면 눈물이 흐릅니다

  그때 흘러나오는 음악은 꽃입니다

 

  우리는 끝없이 서로를 지원했던 파장

  끊어질 듯 이어져

  지층의 뿌리에서 천상의 꽃으로 회복했습니다

 

  우리를 맴돌던 별들이 은하수로 쏟아집니다

  귓속으로 들어온 커다란 세계

  연약함이 끝내 강한 것을 구했습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이 시편은 "페어링"을 매개로 단절되고 차단된 "길"을 지나고 극단의 세기를 넘어서 열리는 새로운 생성의 예감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는 이영옥의 시적 발화에서 빈번한 인칭인데 여기에서도 상호주관의 지향으로 쓰인다. "얼음"이 녹아 서로 공감하는 "눈물"로 번지면서 "음악"처럼 화해의 지평이 펼쳐진다. "우리는 끝없이 서로를 지원했던 파장"이라는 구절에 이르러 이 시편은 하나의 경계를 얻는데, 이어서 "지층의 뿌리에서 천상의 꽃으로 회복"하는 장관을 연출한다. 비록 이러한 장관이 환각이거나 환상이라고 하더라도 시적 과정에서 중요한 지평을 개진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귓속으로 들어온 커다란 세계"가 있으므로 단절과 고립, 고갈과 소멸의 현실에서 기다림과 견딤을 지속하게 한다. 시는 이러한 기다림과 견딤의 과정에서 꽃핀다. (p. 시 20-21/ 론 151-152) (구모룡/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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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하루는 죽고 하루는 깨어난다』에서/ 2022. 10. 30. <걷는사람> 펴냄

  * 이영옥/ 경북 경주 출생, 200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사라진 입들』『누구도 울게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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