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
정준규
나는 양수가 출렁이는 검은 바다를 건너왔다
그러나 나의 근원은 아직도 부재중이다
삐걱대는 불이문을 지나
우담바라 만개한 봄날을 걷는다 해도
여전히 나는 없다
누대의 습으로 나는 시방세계를 천방지축
떠돌아다닌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나를 잡아당기는 저 무지막지한 힘
나는 수형자처럼 사각의 링에 갇혀 있다
한 생의 돌개바람이 고목의 생각 위에 웅크리고 있다
층층이 습기로 둘러싸인 수영장처럼 새벽 세 시
나는 파랑으로 일렁인다
나의 상은 허망한 것이어서 깨달으면 나도
부처라는데 무당벌레처럼 화려한 나는
아무래도 가짜다
아직도 쉼 없이 출렁이는 휴화산
기억의 지층 검은 원유로 흐르고 있는
뒤엉킨 생의 파고를 다독이며
정제되지 않은 나는 오늘도 웃으며
지문 없는 나를 건넨다
-전문-
* 금강경에서 차용
해설> 한 문장: 시인은 명함을 "지문 없는 나"라는 멋진 비유로 표현하고 있다. 지문이 없다는 것은 진정한 내가 아닌 허상이라는 것이다. 명함은 사회적으로 요구되고 평가되고 인정되는 나의 증표이다. 그에 반해 지문은 실제로 존재하는 나이고 생물학적으로 존재하는 나의 표식이다. 그런데 이 둘은 항상 불일치를 겪는다. 그래서 시인은 "나의 근원은 아직도 부재중이다"라고 생각하고 "삐걱대는 불이문을 지나"고 있다고 느낀다. "시방세계를 천방지축/ 떠돌아다니"면서 세상을 경험하고 많은 일을 하고 때로 업적을 남기고 경력을 축적해 가지만 시인은 그것이 나에 대한 허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나를 잡아당기는 저 무지막한 힘"이 있어 시인은 "사각의 링" 같은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혼자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된다. 그 힘이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는 힘인 것은 물론이다.(p. 시 24/론 122) (황정산/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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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저절로』에서/ 2022. 9. 15. <미네르바> 펴냄
* 정준규/ 경남 남해 출생, 2014년『미네르바』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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