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눈 내리는 겨울밤에 월오교를 걸었다/ 김주완

검지 정숙자 2022. 9. 27. 15:52

 

    눈 내리는 겨울밤에 월오교를 걸었다

 

    김주완

 

 

  그날 거기서 나는 길을 잃었다

  길을 걸으며 길을 잃었다

  달의 마을로 들어가는

  달 뜨는 월오교*에 달 뜨지 않은 밤이었다

  달 뜨지 않아도 눈부시게 밝은 밤이었다

  내가 처음 목격한 백야에는

  하얀 옥양목이 천지 간에 펼쳐져 있었다

  쉼 없이 하늘에서

  하얀 목화송이가 속절없이 쏟아져 내렸다

  하얀 길 위의 나는 하얀 유니콘이 되어

  눈부시게 하얀 키 큰 나무를 따라

  긴 뿔을 쳐들고 하염없이 걸었다

  방랑은 거기서 시작하였다

  눈 내리는 겨울밤에 월오교를 걸으며

  마음엔 꽃이 피는데

  얼굴에는 까닭 모를 눈물이 흘렀다

  발성을 잃어버린 나는 그러나 울 수가 없었다

  시력을 잃어버린 나는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시력과 발성이

  하얀 테두리의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눈길을 밟고 오는 순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나는 천사의 기척일 것이라 생각했다

  눈길을 밟으면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뽀드득 뽀드득

  단단히 여미어 끌어당기는 찰진 소리가 났다

  이리 와라 이리 와라

  소리에 끌려가며 소리에 익숙해지다가

  끝내 나는 청력까지 잃고 말았다

  소리는 어느 곳에서는 귀를 열고

  어느 곳에서는 귀를 닫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하얀 둘레의 블랙홀에 흡인된

  사랑은 청맹과니

  사랑은 벙어리

  사랑은 귀머거리

  몰라서 가는 아름다운 길이 사랑이었다

  잠시 눈부시고 오래 슬프게 가는  길

  나설 때는 황홀하지만

  돌아올 때는 쓸쓸한 길이 사랑이었다

  사방이 길인 하얀 세상에서

  길을 잃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떠돌지 않으며 서 있을 나무는 어디에도 없다

  방랑은 그러므로 싱싱하고 절실하고 성스러웠다

  잃어버린 길을 찾아 길에서 길로 떠돌다가

  밤 깊어 지친 세상 끝에서 돌아와

  다시 월오교를 걷는

  훗날의 무채색의 풍경화에는

  속절없이 내리면서 끝까지 녹지 않는 눈이

  거기 그렇게 여전히 하얗게 쌓이고 있었다

    -전문(p. 120-121)

 

   * 월오교: 경북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 아랫개에서 낙동강에 합류하는 동정천의 마지막 교량이다. 강에 근접해 있는데 속칭 달오교라 부른다. '월오月塢'는 달이 뜨는 후미진 곳' 또는 '달마을'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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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정문학』 2022년 제35호 / <시와 시조> 에서

   * 김주완/ 1984년 『현대시학』에 추천 완료, 시집『주역 서문을 읽다』외, 카툰에세이집『짧으면서도 긴 사랑 이야기』, 저서『아름다움의 가치와  시의 철학』외, 논문『시의 정신치료적 기능에 대한 철학적 정초』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