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삭이는 바나나
지정애
한때 나는 항아리에 은닉되곤 했지요
독점욕이 강한 사람들이 내게 새로운 세계를 가르쳐 줬어요
무풍지대와 그늘이 있어 엄마의 자궁처럼 안락했어요
늘 웅크리고 있는 내게 다시 태어나고 싶은 사람들이 오곤 해요
그때 나는 과일을 넘어선 그 무엇이 되는 거지요
나의 단맛은 몽정 같은 것
한 다발이면 맨홀 같은 하루를 채워줄 수 있을 거예요
나를 우적우적 씹으면서 실컷 숨으세요
새 탯줄을 잡은 기분이 들 때까지
글러브처럼 포획을 노리는 나의 전략, 슈가 포인트엔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있어요
씨 없는 나는 혼신의 향기로 모두의 연인이 되는 거지요
비밀이 너무 많으면 몽상으로 등이 휘어진 나처럼 될 수 있어요
나의 길쭉한 색깔은 가위눌린 노란 하늘과 비슷해요
퍼렇게 시치미 뗀 나는
오늘도 해먹처럼 흔들리는 사람을 기다려요
-전문-
해설> 한 문장: 마침내 화자는 그러한 '당신'에게 전하는 자, "다시 태어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속삭이는 바나나」) 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비록 "씨 없는 나"라는, 스스로 미래와의 연결 고리가 될 수는 없는 존재의 한계를 인식하지만 '너'를 위해 노래한다. 이는 자신의 현재와 능력을 분명이 인식하고 있다는 자기 고백이다. 이러한 자기 고백은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오늘도 해먹처럼 흔들리는 사람을 기다려요"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 화자의 다짐이 그저 추상적인 시인으로서의 '소명의식'이 아닌 치열한 극복 의지의 소산임을 짐작케 한다. (p. 시 24-25/ 론 163-164) (정우진/ 시인)
------------------------------
* 『속삭이는 바나나』에서/ 2021. 12. 24. <서정시학> 펴냄
* 지정애/ 경북 안동 출생, 200년 『서정시학』으로 등단, <시가마> 동인
'시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울/ 구재기 (0) | 2022.09.28 |
---|---|
능선 외 1편/ 지정애 (0) | 2022.09.25 |
언 강을 보러 갔다 외 1편/ 정영선 (0) | 2022.09.21 |
석고 캐스트*/ 정영선 (0) | 2022.09.21 |
일몰 외 1편/ 김미연 (0) | 2022.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