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석고 캐스트*/ 정영선

검지 정숙자 2022. 9. 21. 00:48

 

    석고 캐스트*

 

    정영선

 

 

  몸이 울었던 구멍이다

  살려고 격렬히 뒤틀던 몸을

  죽음이 고요히 바라보던 구멍이다

  뛰어가다 엎드린 장딴지 힘줄

  급습하던 유황 냄새에 급히 코를 막던 포갠 손 선연하다

 

  화쇄암이 덮친 도시

  술병은 새긴 그림을 붙들고 버텼다 이천여 년을

  도자기 그릇은 무늬와 함께 잔해를 지켰다

  문을 똑똑 두드릴 누군가를

  재를 덮어쓰고서 기다렸다

 

  부르던 이름이 사라지고

  살랑거리는 머리카락, 입술

  굴리던 생각, 갈망, 설렘도 흔적 없어진 자리

  저토록 슬픈 자세의

  몸 구멍 하나씩 남겼다

  저 구멍이 애걸복걸을 실은 삶의 원형이다

  의욕 애욕 슬픔을 담은 몸 그릇의 원천이다

 

  청동거울이 고대인의 심연을 비췄다면

  아크릴 거울은 내 심연을 비춘다

  나는 허기이고 절벽이고 도화선이고

  사랑에의 갈구이고 흐르는 시간이다

  그 전부는 예정된 구멍

  몸이 건널 절명의 순간을 숨긴 구멍이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나를 지나간다

  절절한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오늘 어떤 자세로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할지를

 

  허공은

  몸이 빠져나간 구멍들이 겹겹 누운 시간의 심연이다

 

  목줄을 풀어 주지 못한 개에 대한 죄책감

  목줄을 당기며 앞발을 세운 개의 핏빛 눈과 헐떡거림은

  구멍에 찍힌 영원한 지옥도다

 

  그날 올리브나무 아래

  빵이 구워지길 기다리는 줄에는

  그날 처음 눈을 맞춘 연인도 있었을 텐데

     -전문-

 

   * 석고 캐스트: 고고학자 피오렐리는 폼페이 화산재가 덮은 구멍만 남은 자리에 석고를 부어 죽은 사람의 자세를 복원했다.

 

 

  해설> 한 문장: 화산재로 뒤덮힌 폼페이의 폐허에서 발견된 구멍들은 "죽은 사람"의 몸과 자세를 텅 빈 형태로 보존하고 있다. 그 빈 곳에 석고를 부으면 죽은 사람의 몸과 자세를 고스란히 복원할 수있을 정도다. 최후의 순간에 "몸이 울었던 구멍"이자, "살려고 격렬히 뒤틀던 몸을/ 죽음이 고요히 바라보던 구멍"들. "저토록 슬픈 자세의/ 몸 구멍"들과 그 "구멍에 찍힌 영원한 지옥도"를 남기고 사라진 고대문명은 현대문명의 "예정된"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미리 보여 주고 있는 것만 같다. "몸이 빠져나간 구멍들이 겹겹 누운 시간의 심연"인 '허공'을 향해 정영선은 "절절한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오늘 어떤 자세로/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할지를". 정영선이 추구하는 삶이 자세와 방향은 '복원'과 '이탈'의 상반되는 움직임을 동시에 갖는다. "허기이고 절벽이고 도화선이고/ 사랑에의 갈구이고 흐르는 시간"인 '나'는 "내 안에 파묻힌 사람"들을 복원함으로써 '이전의 나'로부터 빠져나오게 된다. (p. 시 19-21/ 론 149) (김수이/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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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의 꿈으로 호출될 때 누구는 내 꿈을 꿀까』에서/  2022. 9. 15. <파란> 펴냄  

* 정영선/ 199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장미라는 이름의 돌멩이를 가지고 있다』『콩에서 콩나물까지의 거리』『나의 해바라기가 가고 싶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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