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눈맛/ 손준호

검지 정숙자 2022. 8. 26. 01:58

 

    눈맛

 

    손준호

 

 

  하늘 언저리 퍼질러 앉아

  누가 제빙기를 살살 돌리고 있나

  구메구메 눈발이 실실 날리고 있다

  먼 산은 된바람에 몇 차례 몸을 털고

  몸 턴 자리에 다시 눈은 쌓이고

  그렇게 얼어붙었다 녹았다 사라지면

  한갓진 마음 구석 응달의 잔설처럼

  희부윰 쓸려갔다 잊을 만하면 오늘같이

  웅크린 모과나무 발등을 적셔 오기라도 하면

  너를 털어냈던 자리에 문득문득

  다시 네가 쌓이는 이 순간만큼은

  첫사랑이란 이름을 꺼내 봐도 좋으리

  찻잔 둘레에 온기가 사무쳐 오고

  얼음장 밑에 숨겼던 수줍은 연서 몇 문장이

  칠락팔락 송이눈처럼 가슴에 흩뿌려 오면

  읽던 신문을 접고 누런 잔디 마당에 나가

  아아아, 입 벌리고 눈맛 좀 다셔도 좋으리

  어디에 안착할까 이리저리 눈치 보는

  눈송이의 비행을 감상하는 구경꾼 되어

  그냥저냥 밥맛 잃고 눈길만 걸어 봐도 좋으리

     -전문-

 

  해설> 한 문장: 과잉과 결여를 통해 시는, 시를 넘어서서 스스로 고양되는 폐쇄적이면서도 현실에서 건너온 손을 놓지 않는 일종의 이율배반적인 위상을 갖게 된다. 대상은 대상을 넘어서는 무엇으로 변해 시인을 흔들고, 시인은 대상과의 뒤섞임을 통해 전에 볼 수 없던 문장을 만들어내는바, 예컨대 시인의 시선에서 대상이 뒤틀린다면 이러한 '뒤틀림'은 대상에 작용하여 그 변이를 촉발하며 그 역도 동일하다. 주체와 대상은 본질적으로 매개되어 있다는 헤겔의 명제를 취하지 않아도 우리는 일상 속에서 자주 이러한 사태들을 만난다. 외관은 변하지 않았지만 이 '나' 혹은 '대상'은 그 순간부터 이전과는 전혀 다른 '나/대상'으로 바뀌게 된다.

 

    //

 

  눈이 내린다. 하늘 언저리에 퍼질러 앉은 누군가가 제빙기를 돌리는 듯, 눈은 구메구메, 실실 날린다. 저기 먼 산은 된바람에 몇 차례나 무거운 몸을 털지만, 다시 눈은 내려 쌓이고 겨우내 얼어붙었다 녹기를 반복한다. '너'를 털어냈던 자리마다 문득문득 새로 돋는 눈, 끝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지만 그 눈의 이력을 바라보는 마음은 슬픔의 자락을 넘어 처연할 뿐이다. 이를 반증하듯 한갓진 마음 구석에 잔설처럼 응달이 잔뜩 웅크려 있다. 날이 차고 기울면서 쓸려갔다가는 다시 밀려오는 것인데, 잊을 만하면 오늘처럼 모과나무 발등을 적셔 그 향을 가져오고서는 희미한 채로 한 발 물러선다.

  다시 눈이 내린다. 시인은 밖으로 나가 눈의 무게를 하나하나 살펴본다. 심호흡을 하는데 어디선과 모과차를 끓인 듯한 향기가 사무쳐 온다. 혈관을 타고 돌아 온몸을 이완시키더니 몸 밖으로 빠져나와 주위마져 온통 적시는 것이다. 때마침 된바람이 불어와 산들을 뒤척거린다. 바람이 지나간 산은, 멀고 가깝고 할 것 없이 온몸을 감싼 흰 모시 조각들을 털어낸다. 그때마다 흩날리며 멀리 날리는 저 충만한 잔설들. 눈은 또 내리고 쌓이는데 "너를 털어냈던 자리에 문득문득/ 다시 네가 쌓이는 이 순간만큼은/ 첫사랑이란 이름을 꺼내 봐도 좋"지 않을까. (p 시 94/ 론 135 // 147-148) (박성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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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당신의 눈물도 강수량이 되겠습니까』에서/ 2022. 8 10. <시산맥사> 펴냄 

  * 손준호/ 1971년 경북 영천 출생, 2021년『시산맥』으로 등단, 시집『어쩌자고 자꾸자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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