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백지에 물들다/ 김태신

검지 정숙자 2022. 8. 24. 02:04

 

    백지에 물들다

 

    김태신

 

 

  백지에서 시작한다

  밤새 쓰고 돌아보면 백지다

  천인절벽, 벼랑 끝의 고요가 허공을 만진다

  발자국과 발자국 사이

  인생을 가려 딛고 걸어온 고요의 아픈 자리가

  새벽이면 눈먼 낙타울음을 운다

 

  절절하게, 아득하게 걸어가야 할 삶의 허기

  타는 입술로 채우고

  사막을 걷는 늑대의 긴 그림자를 핥는

  모래언덕의 바람처럼

  캄캄한 심장을 향해 질주하는

  비상砒霜의 약효를 되돌릴 수 있는

  생경한 연민의 언어가 목마르다

 

  가볍고 수월하게

  낙하하는 석양의 잎처럼

  악필로 써진 생의 이름이라 할지라도

  무정과 허탈의 황폐한 백지에 묘비 하나 세우고

  생을 묻을 수는 없을까

  과연 그럴 수는 없을까

     -전문-

 

  해설> 한 문장: 김태신 시인에게 시는 무엇일까? 그가 첫 시집을 상재하면서 붙인 제목이 「백지에 물들다」이다. 이 시의 2연에서 보여주듯이 그에게 시 쓰기는 삶의 노정과도 같은 일이다. 삶의 전체가 시 쓰기에 집중되어 있다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다.

  시인이 절규하듯 읊조리는 다시 백지가 되는 삶의 허기를 견디며 시로 승화시키는 일이 김태신 시인이 추구하는 삶의 길이라 하겠다. 백지로 시작하여 다시 백지로 끝나는 반복을 거듭하면서도 주저앉지 않고 또다시 시작하는 결기가 모든 색을 담는 백지의 빈 공간을 압도한다. 거친 사막에서 "생경한 연민의 언어가 목마르다." 채워지지 않는 삶의 허기와 욕망의 대결 속 내면의 시적 화자는 백지다. 흡족하지 못한 상태에서 백지를 들고 다시 시작해보면서 "무정과 허탈의 황폐한 백지에 묘비 하나 세우고/ 생을 묻을 수는 없을까" 시인은 소망해 본다. 이는 시 한 편 남기고 떠나고 싶은 시인의 소박한 열망을 표현한 것이며, 그것은 차디찬 묘비에 뜨거운 한 획을 긋겠다는 시에 대한 지고지순한 꿈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백지에 물들이며 살아간다.

  시인의 말을 빌리면, "이 세상 어디에도 나를 온전히 담을 곳"이 없었지만 오직 시에 담으며 버티고 지탱한 것이라 표출한다. 삶의 어두운 터널 속에서도 시를 쓰는 순간만은 "마음의 밝은 빛이 지나갔다"고 밝힌다. 시를 사랑하며 시에 매달리면서 자신을 고스란히 시에 담으며 극복해간 시간들이다. 운명을 사랑하며 운명과 대결하는 삶의 모습이 이 시에 깊이 담겨 있다. (p 시 11/ 론 108-109) (구명숙/ 시인, 숙명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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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백지에 물들다』에서/ 2021. 11. 24. <시선사> 펴냄 

  * 김태신/ 1956년 경북 대구 출생, 2018년『시선』으로 등단, <시 가꾸는 마을>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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