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한여름 밤의 독서/ 김기택

검지 정숙자 2022. 8. 5. 14:33

 

    한여름 밤의 독서

 

    김기택

 

 

  짧게 그은 밑줄 하나에 다리들이 달려 있었던 것일까

  움직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밑줄은 안 보이고

  밑줄이 지나간 길만 남아 있다

  기어 다니는 밑줄 하나가 어찌 저리 빠를 수 있을까

  책상 위를 닥치는 대로 돌아다니는 바람에

  길이 어지럽게 엉켜 있다

  미로를 빠져나온 미로가 다시 미로로 들어가고 있다

  그 길을 눈으로 좇다가 시선이 꼬인다

  손바닥이 내리치는 순간

  밑줄은 길을 아득한 벼랑으로 떨어뜨리며 날아오른다

  밑줄이 사라진 지 한참 지난 자리를 손바닥이 내리치고 있다

  공중에도 밑줄은 보이지 않고

  허공은 다시는 풀 수 없도록 헝클어져 있다

  다시 책을 읽으려는데

  혼란스러운 밑줄의 회로가 책 위에 다시 나타난다

  밑줄이 마구 내달리는 기세를 피하려다

  글자들이 좌우로 갈라진다

  흩어졌다 뭉쳤다를 되풀이하다 문장의 대오가 뒤엉킨다

  제자리로 돌아오려던 글자들이

  미로를 풀다가 미로에 얽혀 묶이고 또 묶인다

  완강한 평면과 사각을 지키지 못하고

  책상도 울퉁불퉁해지면서 구불거리면서 모서리를 찾고 있다

  어디서 실마리를 찾아야 하나

  꼬인 시선을 풀지 못한 채 독서는 한창 헤매는 중이다

     -전문  (p. 1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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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상인』 2022 - 7월(4)호 <시-움> 에서

   * 김기택/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껌』『갈라진다 갈라진다』『울음소리만 놔주고 개는 어디로 갔나』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