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구절초 앞에서는/ 이관묵

검지 정숙자 2021. 4. 3. 16:48

 

    구절초 앞에서는

 

    이관묵

 

 

  구절초 피었다고

  구절초 피었다고

  금산錦山이 둥글게 부풀어 오르더군

  구절초 앞에

  널찍한 오후 펼쳐놓고 둘러앉은

  골안개 자욱한 일교차들

  정문正門없는 안색들

  마음이 마음을 건드려 빛을 발하듯

  구절초 앞에서는

  구절초 앞에서는

  왜 이별을 만든 이유가 말해지는지

  왜 모든 얼굴들이 이해되는지

  왜 사람이 초기화되는지

  최적화되는지

  마음 줄줄 엎질러진 얼룩 같은 꽃

  혹은 그 후문後門 같은 꽃

     -전문-

 

 

  해설> 한 문장: 나는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관묵은 독자를 가르치지 않는다. 시는 도덕의 교재가 아니다. 시는 재도지기載道之器가 아니다. 시인이 낮은 목소리로 허공에 "마음 줄줄 엎질러진 얼룩 같은 꽃"을 새긴다. 구절초가 피었다. 꽃이 '나'에게 전해주는 것은 무정형의 마음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침묵의 꽃이 기다렸다는 듯이 마음을 건넨다. 누구나 받을 수 있지만 아무나 받지 못하는 그 꽃은 흉중 어둠에 숨어 있었다. 꽃의 마음에 촉지觸指할 수 있어야 '나'의 마음도 받아들일 수 있다. 꽃의 마음이 '나'의 마음을 건드린다. 각이 솟는다. 빛이 퍼진다. 구절초 앞에서 일어난 일이다. 시인이 발견한 수긍의 대상이다. "이별을 만든 이유"를, 그 이별을 실행한 그 사람과 '나'를 이해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별을 받아들인 수밖에 없다. 이별의 "후문 같은 꽃"이 '나'를 기다린다. '나'가 발견한 것이 아니다. 꽃이 나를 선택했다. 시인이 시 속에 구젛초를 심어놓았다. 우리가 봉독한 꽃의 말이다.  (p. 시 37/ 론 108-109) (장석원/ 시인 · 문학평론가 ·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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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반지하에서, 2021. 3. 18. <지혜> 펴냄

  * 이관묵/ 충남 공주 출생, 1978년 『현대시학』을 통해 작품활동 시작. 시집 『동백에 투숙하다』 『시간의 사육』 『흑동백』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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