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따라 번지는 불의 장미
진혜진
더 처음으로 가면
끈에 묶인 물고기자리와 통하는 물, 그러므로 나는 불
붉은 색은 인주처럼, 왜 풀어지는 장미목줄 사라지는 도장을 새긴 것일까
물결치는 당신에게 휩쓸리면 허우적거리는 나를 삼켜버릴 것 같아
나는 물을 따라 번지는 불
불이 숨을 쉬면 전체가 소문이야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일까 헤어지자 우리
우린 닮아서 다름과 다름 아닌 것도 증명하는 서로의 극, 불에도 비린내
도드라진 몸이 도장으로 박히고 붉어지는데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백 번 결별하고 수천 번 감정을 사고팔지
수는 木 화는 土와 통한다는데
신뢰 앞에 증인으로 소환된 당신은 끝까지 수, 나는 마침내 화
좋았던 기억은 유실물, 증인이라는 유일한 가능성
더 장미의 바닥으로 가면 발바닥이 없고
만발했던 계약 5월 중순의 진원지가 없고
벼락 맞은 서로의 대추나무가 몸속에 있어
-전문-
▶주객(主客) 분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세계 인식(발췌)_ 김윤정/ 문학평론가
자아와 타자 사이의 주객 분리의 원칙을 상기해내는 것은 "내"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행할 수 있는 가장 우선적인 일에 해당한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너와 나의 인연의 자락을 헤집고는 그 끝에 도달하고자 한다. 각자의 존재의 근원을 이해한다면 너와 나의 분리 가능성도 가늠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도 신통치 않아서 내가 확인하는 것은 "장미"의 "발바닥이 없"다는 사실이거나 "만발했던 5월"의 "진원지가 없"다는 인식 정도이다. 이들이 너와 나의 분리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줄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대신 "더 처음으로 가"서 발견하게 되는 "끈에 묶인 물고기자리와 통하는 물"의 모습은 오히려 너와 나의 연기(緣起)의 필연성을 말해준다. "끈에 묶인" 너의 운명이 불가피한 것이었다면 나의 운명 또한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겠는가. 너와 나의 운명이 그러하다면 나와 너의 만남 또한 피할 수 없는 일에 속한다. 그리고 이점은 너와 나의 차이에도 대추나무가 몸속에 있"는 것처럼 우리는 닮아 있는 것이고 바로 그 점이 너와 나를 만나게 하였다는 것이다. (p. 시 242/ 론 254)
----------------
* 『시산맥』 2020-여름호 <미학적 통증과 사유/ 신작시/ 작품론>에서
* 진혜진/ 2016년 《경남일보》 & 《광주일보》 신춘문예 & 『시산맥』으로 등단
* 김윤정/ 2007년 『시현실』로 등단, 저서 『불확정성의 시학』 『한국 현대시 사상 연구』 등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술 깰 무렵/ 복효근 (0) | 2020.05.24 |
---|---|
고택문화체험관記 (0) | 2020.05.24 |
한용국_문학이라는 장소: 선하고 여린...(발췌)/ 나비들의 귀환 : 김상미 (0) | 2020.05.20 |
매화가 핀다지요/ 조유리 (0) | 2020.05.20 |
붉불*/ 박일만 (0) | 2020.05.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