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책잡히다/ 상희구

검지 정숙자 2019. 11. 8. 00:41

 

 

   대구 712

 

  책잡히다

 

  상희구

 

 

옛날 어느 시골에 참 어질고 착한 한 선비가 살았다네. 마음이사 정갈하고 맑았지만, 집안이 너무 가난했어. 아이들 끼니도 지때 몬 낋이주면서, 그래도, 이부제 짐시럽을까바, 아내는 맨날 맹물만 가득 채운 빈 솥에 연기만 피운다. 자애로운 선비 어미는 아들이 바깥 출입할때마중, "지발, 시상 밖으로 나가거덩, 다른 사람한테 책잡힐 일일랑 하지말거라" 신신당부로 하는데, 급기야, 집에 아이들은 부황浮黃이 들었다.

누리끼리하기 퉁퉁 붓기 시작하는 아이들 얼굴을 대할 때마다, 애비는 입 안에 침도 다 말라버려서 더 마릴 침이 없는데, 마침내, 맑고 정갈한 선비는 마음에 결단할 것도 없이, 그냥 그대로 무덤덤히 행한다.

집안 장롱 속에 깊이 깊이 감추어 두었던, 조상들 대대로 누백년 전해오던, 한 권에 천 냥은 간다는, 나라의 희귀 고서를 고을에 돈 많은 부자 영감에게 책을 잡히고 쌀 한 말을 얻어오니.

오호라, 슬프구나!

착하고 어진 선비가 책을 잡혔으니, 책잡힌 꼴을 진정 어쩌랴!

 

                          

  세상살이를 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약점을 잡히면, 그때부터는 기가 죽어서 힘을 못 쓰게 되니, '책잡히다'는 이런 경우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어원을 두고 말하자면 '책잡히다'라는 말에서 가령, 여기에 한 가난한 어진 선비 집에, 오랜 옛적부터 귀한 가보家寶로 간직해오는, 지금의 국보급만큼이나 엄청난 값어치가 있는, 『훈민정음해례본』만큼한, 책 한 권을, 너무 가정 형편이 어려워, 이책을 어떤 기관에다 저당 잡히고 돈을 빌려 썼다고 했을 때, 이는 분명히 '책을 잡히고' 돈을 빌려 썼으니 영낙없이 '책잡힌' 꼴이 된다. 이렇듯, 하나의 '말'의 생성 과정이 활용과 확장을 거듭하니 참으로 신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처음 대하고, 이 말의 어원을 규명하던 끝에 시인의 상상력이 도출한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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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때: 제때

  * 이부제 짐시럽을까바: '짐시럽다'는 등에 짐을 지면 무거워 부담이 되니, 이와같이 다른 사람에게 마음에 부담을 주게 되는 일을 '짐시럽다'고 한다. 여기서는 '밥을 굶는 일이 이웃에 걱정을 끼치게 될까 봐' 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 부황: 浮黃. 오래 굶주려서 살가죽이 들뜨고 얼굴이 붓고 누렇게 되는 증세

  * 누리끼리하다: 누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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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오솔길 끝에 막은안창집에는 할매 혼자 산다』에서/ 2019. 10. 25. <오성문화> 펴냄

  * 상희구/ 1942년 대구 출생, 1987년『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발해기행』『숟가락』등, 연작 장시『大邱詩誌』(1집~5집), 『大邱, 達城詩誌』(6집~8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