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자의 단시집에 부쳐
飛翔의 논리와 열망
金容稷
문학평론가, 서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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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는 어느 의미에서 변신이며 변혁이다. 아니, 詩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작품이 생리적으로 그렇다. 본래 예술, 또는 詩는 아름다움을 지향한다. 그런데 그런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체 부정과 그를 통한 탈각작용이 불가피하다. 가령 봄 꽃밭을 나는 나비를 우리는 아름답다고 말한다. 사실 장다리 꽃밭에서, 또는 자운영 가득히 핀 들판에 넘실대는 날갯짓으로 하늘을 가로지르는 나비는 우리의 꿈이며 회화요 詩다. 그러나 그런 비상이 있기까지 나비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유충의 알이었다. 그후 그것은 애벌레로 푸성귀 잎새에 기생하는 오랜 낮과 밤을 거친다. 그리고 마지막 허물을 벗고는 비로소 꽃밭과 그 위에 펼쳐진 天空을 가로지르는 춤을 추게 된 것이다. 물론 詩가 획득하는 심미의 次元은 나비나 잠자리, 제비나 철새의 비상 이상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확충논리의 전제 역시 참이다. 즉 詩를 위해서 詩人은 좀더 철저한 변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그의 꿈이며 企圖요, 유일 최대의 목표인 詩가 참으로 아름다운 飛翔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이번에 上梓되는 鄭淑子 시인의 단시집은 이 시인에게 다섯째 번 사화집이라고 한다. 이 사화집에 수록된 시편들은 두 개의 특질을 가진다. 그 하나가 형태상 매우 짧다는 점이다. 이 시집에 수록된 상당수의 작품이 두 줄 열 단어 이하로 끝나 있다. 한국 현대시사에서 단형시를 주로 쓴 시인에 金永郞이 있다. 그는 《詩文學》에 등장할 때부터 즐겨 4행으로 된 작품들을 썼다. 그리고 그후 우리 시단에서는 단형시 이야기가 나오면 곧 그가 거론되어 왔다. 그런데 이번 시집에서 鄭淑子는 그보다도 더 짧은 詩를 그것도 상당수 선보였다.
다음 이번의 시집에서 鄭淑子 시인이 시도한 또 하나의 특질은 그 말씨들의 맵짠 점이다. 이 시집의 작품들은 그 길이가 짧은 가운데 우리 意表를 찌르는 말솜씨를 바닥에 깔았다. 그것으로 많은 작품들이 우리에게 상당량에 달하는 정신의 자장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작품들은 그 좋 8쪽은 보기가 되는 경우다.
개구리 꽈리부는 모내기철엔
농부들 연등처럼 못줄에 피네
―<대본> 전문
十字架로 선 세월
가시만 남아도
가슴에 꽂을
―<장미> 전문
위의 작품의 무대배경은 모내기철 어느 농촌의 들판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침 때는 모내기철이어서 무논에는 농부들이 못줄 앞에 늘어서서 이미 논바닥 여기저기에 운반되어 온 모들을 차례로 심어 나간다. 이런 농부들의 일과 음력으로 4월 초파일날 절간에 다는 연등과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 연등은 해탈, 열반, 대자대비의 정신세계를 상징하는 불교의식의 소도구다. 그에 대해 모심기는 농업의 한 방식일 뿐이다. 그럼에도 <대본>은 짧은 두 줄을 통해서 이 이질적인 두 개 현상을 한 문맥으로 엮어내기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매우 밉짠 가운데 참으로 그렇다는 느낌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장미>에 대해서도 <대본>의 경우와 아주 비슷한 이야기가 가능하다. 일상적인 차원에서라면 장미는 우리에게 꽃의 한 종류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꽃보다 아름답고 향기도 유난스러워서 여러 사람이 고급으로 치는 꽃이기는 하다. 그것을 이 시집에서는 엉뚱하게도 十字架와 대비시켰다. 여기서 十字架란 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집약되는 육신의 희생을 상징한다. 골고다 언덕에서 十字架에 매어 달린 다음 예수는 사지가 못질을 당했다. 그 고난은 인간에게 최악의 사태를 뜻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작품 첫 줄의 세월이 그와 일체가 된 것은 화자의 생활이 골고다 언덕에서 받은 예수의 수난에 버금감을 뜻한다. 그런데 이 작품 다음 줄에는 그것이 장미와 일체화되었다. 구체적으로 장미의 가지와 꽃술 밖의 가시가 그와 동격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다음 장미꽃은 그 고난의 시간을 무릅쓰고 피어난 현상에 지나지 않는 장미가 이처럼 전이된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은 참으로 적절하고 동시에 아름답다는 느낌을 준다. 이것으로 우리는 이 시집의 작품이 지닌 말솜씨 곧 재치를 실감하게 된다.
3
이 시집에서 鄭淑子 시인이 꾀한 시도는 그 자체로서도 재미 있고 유익한 단면을 내포한다. 본래 현대시의 중요한 단면 가운데 하나가 위트시즘이라고 이야기된다. 두루 알려진 것처럼 현대는 여러 이질적 문화현상들이 들끓는 시대다. 그들은 또한 저마다의 존재 의의, 가치체계를 구축해간다. 그리고 그 가운데 여러 문화현상들은 모순 충돌하고, 반목, 상극 상태를 야기하기도 하는 것이다. 詩는 어느 시대이고 역사의 방관자이거나 회피자일 수가 없다. 만약 시가 현실, 역사의 어떤 부분을 외면하는 경우 그것은 소수의 인간만이 즐기는 고립적 양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현대시는 여러 이질적 요소를 기능적으로 수용, 문맥화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때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이 위트시즘이다. 앞서 보인 鄭淑子 시인의 <대본>에 나온 ‘개구리 꽈리 부는’이 이 경우에 주목될 필요가 있다. 모내기철에는 개구리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한다. 무논과 수초가 자라는 못, 시냇가에서 그들은 그 즈음이 되면 극성스럽게 울고 뛰어다닌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목젖 부분을 꽈리처럼 팽창시키는 종류도 있다. 鄭淑子 시인은 그런 개구리 모양으로 모내기철을 집약 제시했다. 그런데 그 바탕이 된 것은 바로 맵짠 말의
쓰임새, 곧 위트시즘인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鄭淑子 시인은 이 시집에서 위트시즘의 연습을 꾀했다. 그러니까 이 시집은 그 자체로도 상당한 의의가 인정된다.
그러나 이 시집의 제작자가 그동안 걸어온 路程을 살피는 경우 이 시집의 의의는 더욱 커진다. 제1시집과 제2시집에서 鄭淑子 시인은 사상, 관념을 시의 바탕으로 삼았다. 먼저 제1시집《하루에 한 번 밤을 주심은》을 보면 그것은 연작시로 思慕라는 제목을 단 시집이다. 여기서 사모는 서정시가 흔히 그런 것과 같이 이성이나 피붙이에 대한 정을 뜻하지 않는다. 거기서 사모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우주 생성, 변화의 원리를 거느리고 있는 듯 보이는 어떤 절대자이다. 그리고 이 연작시의 숫자은 108이다. 두루 알려진 것처럼 이 숫자는 보살행을 이르는 사람이 다스리고 승화시켜야 할 業障이며 번뇌를 가리킨다. 이렇게 보면 제1시집에서 鄭淑子 시인이 시도한 것은 유식철학, 또는 화엄세계를 가락에 실어 읊어내려고 한 것인 듯하다. 제2시집은 거의 제1시집의 연장선상에 있다. 여기서도 유식철학의 경지가 제재의 줄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단 이 시집에는 때로 老莊의 세계에 결부될 정신 영역도 나타난다. 그러니까 다 같은 형이상의 세계에 그 폭을 확충시킨 것이 제2시집이라는 이야기가 가능하다.
다음 제3시집에서 鄭淑子 시인은 상당한 변신을 보여준다. 이 시집에 실린 작품의 숫자도 제1시집과 같은 108편이다. 그러나 이 숫자는 전혀 유식철학의 테두리와 무관하게 정해진 것이다. 여기 담긴 몇 편의 시 곧 <차 한 잔의 순결>이나 <우리 함께>는 이성에 대한 감정이나 이웃에 대한 애정을 읊은 것이다. 그리고 <죽마우>, <첫눈 무렵>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일으키는 정소적 반응을 가락에 실은 것이다. 이어 제4
시집은 더욱 부드러운 사랑 노래로 변모를 보여준다. 이 시집에 담긴 시편들의 세계는 앞서 것들보다는 두드러지게 내밀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노래한 가락들 역시 부드럽고 고운 가운데 면면한 정을 펴려고 든 자취를 드러낸다. 이것은 네 권 시집을 통해 鄭淑子 시인이 몇 가지 시도, 또는 변신을 꾀했음을 뜻한다. 첫째 단계에서 그가 시도한 것은 화엄의 교리에 바랑을 든 넓고 깊은 정신의 세계를 노래하는 일이었다. 다음 단계에서 그것은 우리 이웃과 피붙이에 대한 사랑의 가락으로 변모되었다. 그리고 그에 이어 서정시의 정석으로 생각되는 내밀한 감정, 따뜻한 사랑의 노래가 시도된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鄭淑子 시인은 자신의 詩가 가질 수 있는 정신의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었을 것이다.
詩는 말할 것도 없이 투철한 의식, 고양된 정신의 소산이다. 아울러 詩는 그지없이 넓고 큰 정신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詩는 기법이며 예술이다. 적어도 도저한 정신의 바탕을 기능적으로 읊고 제시하는 솜씨 없이 詩는 완성되지 않는다. 이번에 鄭淑子 시인은 그런 詩의 또 한 국면 곧 기법에 대한 실험을 했다고 보여진다. 특히 위트시즘을 줄기로 한 실험을 통해 이 시인은 그의 詩의 구조적 탄력감을 증진하려고 꾀한 것 같다. 이것은 물론 이 시인을 위해서 매우 뜻 있는 시도다. 이 또 하나의 변신시도가 다음 시집에서는 훌륭한 성과로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이 시인의 꿈이며 날개요, 전 생애인 詩가 산맥을 넘고 구름을 뚫어 아득한 天空을 마음껏 날아오르기를 빌고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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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감성채집기』에서/ 1994. 10. 10. <한국문연>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