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상속포기 청구 외 1편
강성철
아버지를 포기하려고 가장 아버지를 닮았다는 내가
"살아서 평생 고생만 시키더니······"라며 한숨짓는
어머니 모시고, 법원 간다
십수 년 전 어느 날인가?
술 한 잔에 운전면허증도 없는 아버지가
덜렁 차주車主가 되어 돌아왔다고 하신다
그 후 각종 벌금이 아버지 앞으로 배달되고
살아생전 당신이 한 번도 타보지 못한 그 차
의정부 어딘가에 무단 방치되어 있다고 연락이 온 지 얼마 안 되어
폐차처럼 쓸모없게 된 아버지
폐차처럼 분해되어 저승 가시고
평생을 주위 사람들에게 속아서만 살아온 아버지
각종 보증은 도맡아 하시더니 무엇이 그리 섭섭하신지
폐차를 타고 빚이 되어 다시 살아 돌아왔다
재산만 상속되는 게 아니라
빚도 상속된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어머니
"이젠 줄 게 없어서 빚까지 남겨주는구나
젊어서는 사상범으로, 나이 들어서는 각종 보증으로,
말년엔 똥오줌까지 받아내게 하더니······"
아버지처럼은 살지 말라고 늘 당부하시던 어머니
오늘따라 굽은 등이 더욱 굽어 보인다
아버지를 포기하러, 아니 나 자신을 포기하러 법원 간다
내 몸속에 깃들어 있는 아버지를 부정하러 법원 간다
잘 익은 수세미처럼 속이 텅 빈 골다공증의 아버지를 포기하면서
아버지처럼 온몸의 부속품들이
하나씩 마모되어가는 나 자신을 본다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더욱 고개를 내미는 아버지
질긴 인연의 줄 같은 햇살을 타고, 기우뚱거리는 고물차로
술 취한 당신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전문(p. 8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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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아일랜드 8
버릇없는 아이들과 버릇없는 어른들의 버릇없는 싸움
피라미드를 지키는 스핑크스가 수수께끼를 내자, 오이디푸스는 대뜸 요즘 아이들은 버릇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안티고네가 진짜 버릇이 없는 건 아버지를 죽인 오빠라고 흐느끼자 오이디푸스는 아버지, 어머니를 몰라본 버릇없는 죄로 자신의 두 눈을 찔렀다.
소크라테스가 요즘 아이들은 사치하고 버릇이 없다고 광야를 헤매는 오이디푸스를 위로할 무렵, 오스트라시즘을 실시하려는 아테네 아고라 광장엔 오이디푸스 추방을 계기로 스파르타의 못된 버릇을 고치자는 버릇없는 원로들과 그래도 같은 그리스 민족인데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는 버릇없는 젊은 아테네 촛불들이 서로 세 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한편 지도자를 몰아내는 못된 패각추방 버릇이 자신의 왕권에 영향을 미칠까 봐 페르시아 왕은 그리스 해안에서 전함 훈련으로 무력시위를 하였다. 이에 스파르타가 경고도 없이 예의 못된 버릇으로 페르시아 전함을 야간어뢰로 공격하여 침몰시키자, 스파르타에 대한 국제사회의 징계 수위를 정하고자 교황을 중심으로 바티칸에서 각국의 국왕 회의가 열렸다.
처음에는 버릇없는 독일 국왕에 대한 '카놋사의 굴욕' 사건으로 전 세계 국왕 위로 교황이 군림하는 듯했으나 또 다른 버릇없는 프랑스 국왕이 요황청을 '아비뇽 유수'하자, 교황의 힘이 급격히 약화하였다. 그리하여 UN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각국은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하였고, 특히 동쪽의 버릇 없는 섬나라 왜국이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동방의 촛불 조선을 침공하겠다고 선언하자, 풍전등화의 조선 조정은 서로 네 탓이라며 그 버릇없는 사색당파로 나뉘어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이에 이순신이 "전하! 소인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라고 아뢰면서 한산대첩으로 조정의 시름을 그나마 덜어주었다.
페르시아 국왕도 이 틈에 대규모 함대를 그리스로 급파하였고, 이에 스파르타의 정예 용사 300명은 을지문덕의 진두지휘로 페르시아 대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으며, 그리스 연합함대가 살라미스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하자, 승기는 완전히 그리스 연합군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한편 조선의 조정은 주초위왕으로 죽었던 버릇없는 조광조가 부활하여 수구세력에게 제공격을 가하며 민비와 함께 개화파의 재기가 어어지자, 못된 버릇이 몸에 밴 대원군은 버릇없는 민비와 개화파를 몰아내기 위해 서원철폐와 임오군란으로 재무장하였으나, 못된 버릇을 가진 청나라의 개입으로 좌절을 겪었다. 이런 와중에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지고, 전봉준이 버릇없는 관리들을 응징코자 동학란을 일으키자, 슬픈 아일랜드의 백성들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아고라 광장의 촛불로 활활 타올랐다.
한편 페르시아 제국의 침입을 막아낸 그리스는 민주주의를 꽃피우다가 그 민주주의가 주는 못된 버릇으로 소돔과 고모라처럼 타락해져 갔으며, 이내 교황에게 충성하는 변두리 버릇없는 국가로 변해갔다. 그런데 교황이 중세의 신을 앞세우며 점점 버릇이 없어져 가자, 새롭게 등장한 버릇없는 국왕들과 개혁파들이 그리스 인본주의와 손잡고 르네상스를 이뤄냈다. 기고만장한 그리스는 조상들이 만든 문화재로 관광 수입이 많아지자, 버릇없이 흥청망청 돈을 쓰다가 국가부도라는 버릇없는 사태까지 맞게 되었다. 이에 방랑시인 김삿갓은 "어쩌다 북녘땅은 핏빛으로 물들었나?" 하며,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가고, 누구나 서로를 흉보면서 닮아간다"는 풍자시를 읊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이집트 피라미드 벽화에 "요즘 아이들은 너무 버릇이 없다"라는 말로 압축되어 있는 것을 본 비평가 '프라이'는 자신의 저서 『비평의 해부』에서 역사는 늘 같은 버릇을 반복한다는 다시 말해 소통의 부재로 인해 "모든 새것은 옛것의 복원"이라는 신화비평과 원형비평으로 해석하였다.
-전문(p. 6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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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슬픈 아일랜드』에서/ 2023. 8. 10. <문학의전당> 펴냄
* 강성철/ 제주 출생, 1988년『문학과비평』으로 등단, 시집『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실크로드』『사강을 지나며』등, 시평집『시 읽어주는 은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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