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
정진혁
은단 통 안에는 은은이 가득하다
그 동그란 세계가 나에게 왔다
내 정신의 은빛 같은 갈치 같은 은은
얇은 문장으로 내 어색한 비유로 어쩌지 못하는
은은
씹으면
'화'하면서도 쓴 어느 공간이 오기도 하고
손바닥 위에 은은의 눈
한 알 입 안으로 들어가다 놓쳐 버린다
은은 안으로 들어가려고 세상의 다른 기슭에 서서
단어들의 밖을 서성거리기도 하고
은은을 대여섯 알 입에 물면
어느 별에서 낮잠을 자다 일어난 듯
은은은은 잠꼬대를 하며 허공에게 가고 싶다
은단 통이 비어 갈수록
입 안은 관계를 찾아가는 은은이 구르고
은은 흔들릴 때마다
내 생의 끝을 생각했다 거기에는 은사시나무가 흔들리고
은은을 입 안에서 녹이는 동안 겨울이 가고 있다
낮게 가라앉은 소음조차도 은빛이다
고립감이 와글와글
은은에 갇혀서 나를 다 버리고 나는 엎어지고
주머니 속에서 가슴속에서
'왜 얼룩을 믿지 않는 거야?"라는 질문 앞에서
수백 개의 은은이 부딪힌다
-전문-
▶허물어 다시 짓는 말의 집, 불화의 헤테로토피아/- 정진혁 근작시를 중심으로(발췌)_황유지/ 문학평론가
사물은 말을 조우하는 공간이면서 또 다른 세계를 열고, 잇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때 사물들은 시적 화자로 표상되는 시인과 말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연결하는데, 이를테면 "은은"한 세계는 저작咀嚼의 순간 본래의 속성을 벗고 "은사시나무가 흔들리고" "낮게 가라앉은 소음조차도 은빛"인 전혀 다른 세계로 시적 화자를 이전시키는 식이다. 그런 사건을 통해 "나를 다 버리고" "엎어지"는 일은 가능해진다. 이런 세계로의 이전은 "왜 얼룩을 믿지 않는 거야?"라는 질문에 가 닿는다.
시인은 "은은"이라는 말의 세계와 은단통이라는 물질적 세계를 분리하여 사유를 확장하고 이전해 본다. 이것은 은단이라는 물질이 환기하는 감각적 사유의 전이일 수 있겠으나 이보다 더 눈여겨볼 것은 은단통에서 시작한 사유가 흘러가 닿은 지점이 얼룩이라는 것이다. 은단은 애초 은사시나무나 은빛의 소음과는 관계없는 언어의 표면적 유사성으로의 시작점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를 열어주는 시뮬라크르의 하나로 존재한다. 수없이 많은 유사한 작은 알갱이는 언제든 복제 가능한 "수백 개의" 은단으로 실재한다. 그리고 셔츠 윗주머니에 들어가는 순간 "얼룩"의 존재론에 대한 질문을 상기시킨다. 이는 흡사 들뢰즈가 지적하듯, 단순한 모방이 아닌 원본이나 특권을 전복하는 시뮬라크르에 가깝다. 그리하여 끄집어낸 얼룩은 어떤가? 원물질에서 옮겨온다는 점에서 그것은 사본인 것 같으면서도 얼룩은, 원본과 닮지 않고 결코 동일힌 사본도 만들지 않는다. 그러니 은은이 이끌어낸 얼룩의 사유는 그 인식의 방법론에서 동일한 트루기를 통과한 결과물이다. 그러면서도 "은은"한 세계가 그러한 것처럼 얼룩 역시 어떤 것으로부터 파생된 흔적이면서 불일치를 내재화하고 결국에는 그런 요소들로 가득 차서 사물 자체가 되고 만다는 점에서 불신의 오명을 그 존재론으로 짊어지고 간다. (p. 시 98-99/ 론 116-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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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엠피플』 2023-여름(03)호 <IN FOCUS/ 신작시/ 작품론>에서
* 정진혁/ 2008년『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 시집『간잽이』『자주 먼 것이 내게 올 가 있다』『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
* 황유지/ 202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문학평론 부문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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