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를 일
이홍섭
내 단골술집 중 한 집은 육해공 안주가 다 나오는데 그 중에서도 광어, 도다리 회가 일품이다 바닷가 횟집도 아닌데 회를 써는 솜씨가 비범하여 어느 날 한가한 틈을 봐서 주인장을 모시고 여쭤봤더니, 자기는 원래 소를 잡는 백정이었는데 아들 학교에서 아비의 직업을 물어오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에 아들이 초등학교 입학할 때 백정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목숨을 해하는 것을 피하고 싶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쩔 수 없이 지금 이 일을 하고 있다며, 그래도 백정을 할 때보다는 한결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횟감을 육고기처럼 도톰하게 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싶었는데 역시나 했다 그런데 며칠 후 또다시 방문했을 때 주인장께서는 둘둘 말은 화선지 한 장을 갖고 오더니 선뜻 나에게 주시는 것이었다 펼쳐보니 정성 들여 쓴 한문 반야심경이었다 주인장은 아버지가 생전에 쓰신 글이라며 아버지께서는 글을 할 줄 아셨고, 절에도 자주 머무셨다고 덧붙이고는 얼굴이 잠시 붉어졌다 신기한 것은 내가 산속에서 한동안 노스님을 모시고 살았다는 얘기를 이 주인장한테 한 적이 없는데 이 반야심경 두루마기가 어떤 인연을 거쳐 나에게 흘러왔냐 하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두루마기를 다시금 펼쳐보니 단정하게만 보였던 글씨체가 어느덧 간절한 글씨체로 새롭게 살아났다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전문(p.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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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P. S』 2023년-여름(2)호 <P.S 신작시> 에서
* 이홍섭/ 1990년 『현대시세계』로 등단, 시집『강릉, 프라하, 함흥』『숨결』『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터미널』『검은 돌을 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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