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의지 외 1편
홍시율
어떤 꽃이 먼저 필지는 모른다
결기 어린 촉수들을 뻗어
몸에 맞는 언어들로 향기를 부르고
바람을 견디는 투지로
고운 빛깔을 다듬어낸다
쉬이 피울 수 있었다면
슬픈 인내가 필요했을까
거친 토양과 뿌리의 희생 없이
고개 쳐들 수 있었을까
때가 되면 오게 되는 분출일지라도
더 강렬하게
더 늠름하게
햇볕의 수혜로 지혜를 만들고
땅의 촉촉함으로 윤기를 내야 한다
그리고 그 향이 멀리까지 날아가야겠지
어떤 꽃이 끝까지 필지는 아무도 모른다
의지도 폭풍우의 시험을 거칠 테니
-전문(p.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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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쓸모 없는 가슴
나서야 할 때 나서지 못하고
말해야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모르네
아둔함은 모든 아들들의 죄였지
옳고 그름이 무엇 때문인지를 알았네
의도한 대로 떠올랐고 떠오른 대로 살아도
생각조차 짐이 되고 굴레가 되고
눈까지 멀게 되었어 심장조차 쓸모없어져
황폐한 과녁은 말을 잃고
보지 말아야 할 것들 보게 되어
뛰어야 할 때 뛰지 못하는
기능 상실, 고장 난 인간
미각도 오염되어 맛조차 모르는
영혼이 달아난 노래를 누구를 위해 부르나
부서진 시계처럼 때를 모르네
알지 못하네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난처함, 혹은 난해함
가슴도 아닌 것이 가슴인 척
비워진 세상에 가득 차 있는 고독을
심장이라고 하겠느냐
인간을 거역하는 인간이
묻힐 곳은 어디인가
-전문(p. 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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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아무 쓸로 없는 가슴』에서/ 2023. 1. 5. <시산맥사> 펴냄
* 홍시율/ 1966년 경기 안성 출생, 2016년『문학의 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사람이 별이다』『사랑이 지나갔으므로 할 일이 많아졌다』, 산문집『삶이 관성들 다시 읽기』『잃어버린 고양이에 대한 예의』『나를 안아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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