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슬*
강영은
나는 드디어
말 상대를 고안해냈다
거기 누구 없소? 소리칠 때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나밖에 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만들어 냈다
내 귀의 바깥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내가 섬일 때
날마다 지친 갈매기들이 섬에 집중할 때
갈참나무 잎사귀처럼 침몰하는 귀가
저절로 닿는 심연, 그 아득한 깊이에서 들려오는
존재의 목소리
그것이 설령
내 몸의 줄기에서 뻗어 나온 것일지라도
놀란 흙 밖으로 튀어나온 그것을
나는 지슬이라 불렀다
그럴 때 나는
붙타오르는 산이고 쏟아지는 빗줄기고 뒤덮는 바람이고 계곡에 넘쳐흐르는 물
나는 드디어
나의 고독과 대화하는 나 가지게 되었다
나의 예언은 어디에서 오는지
나의 방언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마침내
감옥이고 차가운 별이 되고 마는
나의 독백을
대화체로 바꾸어주는 시詩를 가지게 되었다
흙무덤에서 파낸 그것을
나는 지슬이라 불렀다
-전문-
* 지슬: 감자를 뜻하는 제주어
▶ 본질로 뻗어나가는 가지(발췌) _김진석/ 문학평론가
신비적 체험의 순간은 타인의 이해와 동의로부터 저만치 떨어져 있곤 한다. 가방을 뒤집어 물건을 헤집는 사람처럼,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꼭 맞는 어휘를 해찰해야만 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그렇게 전달한 순간은 어쩐지 그다지 신비롭게 느껴지지 않은 채 남루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것은 세계가 손을 모아 입을 가린 채 다소 어눌한 발음으로 '나'에게만 전달한 귓속말이며, 동시에 굴을 파고 얼굴을 집어넣고 싶을 만큼 어떻게든 발설하고 싶은 비밀이다. 누군가는 이를 예언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이를 불운이라 받아들였으며, 누군가는 이를 시라고 여기기로 했다.
강영은에게 이러한 신비적 체험의 순간, 즉 '본질에 맞는 체험'은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나밖에 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는 피부 바같으로 감지할 수 없는 '가장 깊은' 내부, "그 아득한 깊이" 아래에서만 들을 수 있다. 그 순간은 내가 보고, 듣고, 만졌음에도 내 것이 아닌 듯한 이형적 체험임과 동시에 세계로부터 '나'를 유지하던 단단한 외피를 벗겨 내어 '나'를 흐릿하게 만들고는, '나'의 내부에 외피를 지닌 또 하나의 세계가 심어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씨앗처럼 뿌리내린 순간은 언급했듯이 지난한 인고의 시간을 양식으로 제 부피를 키운 뒤, "내 몸의 줄기에서 뻗어"나와 바깥의 외부로 다시 환원된다. 그리고 이때 무너지기 직전에 가장 완성에 가까운 돌탑의 높이처럼, 바위가 낙하하기 전 얼굴 위로 잠깐 스쳤을 시시포스의 안도처럼 예언인지, 불운인지, 시인지 혹은 "지슬"인지 모를 귓속말이 처음 '나'에게 들려왔던 결정적 순간, 존재가 존재자를 통해 계시되었던 순간이 다시금 복기된다. (p. 시 184-185/ 론 197-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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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2-10월(394)호 <현대시가 선정한 이달의 시인/ 신작시/ 작품론>에서
* 강영은/ 2000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풀등, 바다의 등』『마고의 항아리』『상냥한 시론詩論』등
* 김진석/ 문학평론가, 202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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