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상회 외 1편
우정연
한 생을 족히, 오십 년은 거슬러 올라간
말표 검정 고무신도
화랑 성냥도
오스카 구루무도
새까만 선반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세월의 두께만큼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이제나 저제나 손님을 기다리다
한 생을 족히, 삐걱대는 문짝처럼 늙어온 주인은
강원 연탄 난로 위의 양은 도시락 익는 냄새로
또 한 끼를 채우고 골연초에 절여
사이다 한 병 주세요, 소리에도
성불하신 듯 흔들림 없이 앉아 있는
집
절집.
-전문(p.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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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
텅 빈 공간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샘과 수풀과
짐승과 미물과
소리와 움직임과
산과 바다와 햇살과
중생의 마음과 여백까지
오롯이 품고 있는,
만공이지
-전문(p. 112)
해설> 한 문장: 우정연 시인이 보여준 불교적 상상력은 이제 세계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연민으로 전환된다. '춘천상회'로 대변되는,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거나 관심 밖의 삶에 대해 시인은 불자로서의 불심을 보인다. '춘천상회'에는 팔리지 않은 오래된, "세월의 두께만큼 먼지를 뒤집어" 쓴 "말표 검정 고무신" "화랑 성냥" "오스카 구루무" 등의 물건이 "새까만 선반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다. 시인의 눈에는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이러한 물건들이 모두 해탈의 경지에 든 것처럼 느껴졌으리라. 먼지를 뒤집어쓴 물건들뿐만이 아니다. 정작 시인의 관심은 이 '춘천상회'의 주인에게 있을 터. 상점이 오래되고 낡아서 "삐걱대는 문짝처럼 늙어온 주인"에 대한 집요한 관찰력은 "연탄난로 위의 양은 도시락 익는 냄새"와 "골연초에" 절인 냄새와 같은 민감한 후각적 이미지를 통해 "성불하신 듯 흔들림 없이 앉아 있는" 주인에 대한 존재의식을 드러내는 기막힌 기법을 선보임으로써 더욱 공감대가 확장되고 있다. 그러니 결국 시인이 "사이다 한 병" 사러 들어갔던 상점은 "집/ 절집"으로 치환될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러다보면, 불자로서의 한 삶도 긍적적이면서 동시에 자비로워지지 않을 수 없을 터. (p. 119) (허형만/ 시인, 목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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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송광사 가는 길』에서/ 초판 1쇄 2016. 5. 2. & 초판 2쇄 2021. 5. 3. <불교문예 출판부> 펴냄
* 우정연/ 전남 광양 출생, 2013년『불교문예』로 등단, 시집『자작나무 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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