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제비 뜨는 저녁
강연호
살 만큼 살아 보니 좀 알겠다는 말보다
주절주절한 변명이 있으랴
대체로는 무엇을 알겠다는 건지 얼버무리는 거다
애초에 목적어가 있기는 했나
오늘의 허기를 달래려 수제비 뜨는 저녁인데
이 반죽에서 무슨 세월을 떠낼 수 있을까
어떤 요리 장인의 수제비도 같은 모양은 없고
뭉개고 치대고 찢고 떼고 뜯어내는 게 다는 아니라지만
결국 모든 수제비는 둥글고 펑퍼짐하게 떠오른다
이 형상은 모호하고 그저 덩어리로 있다
가령 미술관의 인상파 그림 앞에서 오래 머무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다
고개를 갸우뚱할수록 뭔가 깊이 아는 사람이다
니가 뭘 안다고 나서, 나서길!
수제비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청천벽력의 세상을 요령껏 건너왔다
나는 용맹정진의 도전을 재주껏 피해 왔다
허깨비가 나를 보면 그저 웃지요 할라나 울지요 할라나
허깨비에게 물어볼 생각은 없다 사실 두렵다
긴 한숨부터 내쉴까 봐 먼저 설레발을 칠 뿐이다
그러면 좀 있어 보인다 이번에는 주어가 없다
살 만큼 살아 보니 수제비 뜨는 저녁이다
수제비는 주걱으로도 젓가락으로도 손으로도 뜨지만
그래 봤자 뭉개고 치대고 찢고 떼고 뜯어내는 게 다라서
눈물이 아니라 수제비 얘기다
수제비를 뜨다 말고 저녁이 우두커니 깊어진다 해도
수제비는 고개를 수그리고 수제비는 두 손을 모으고
수제비는 한껏 둥글게 몸을 말아야 수제비라는 것을
아무리 뜨거워도 국물과 함께 훌훌 감추듯 삼켜야 한다는 것을
어디까지나 눈물이 아니라 수제비 얘기다
-전문-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삶 곁으로(발췌) _이경수/ 문학평론가
"오늘의 허기를 달래려 수제비 뜨는" 평범한 "저녁"의 풍경을 그린 시이다. 사실 강연호의 시는 늘 현실에 단단히 발을 딛고 있었다. 일상의 경험으로부터 시적인 순간이 솟아오르곤 했다. 그의 시가 공감의 힘을 발휘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기성세대가 되고 나면 자기도 모르게 "살 만큼 살아 보니 좀 알겠다는 말"을 하게 되기 쉽다. 어차피 인간의 판단이란 대개 자기 경험의 한계에 갇히기 마련이지만 살아온 세월이 좀 쌓이다 보면 자기 경험을 좀 더 확신하게 되거나 그것을 바탕으로 아집을 갖게 되기도 한다. 조언을 하는 사람이 드물어지고 반대 의견을 표하는 사람이 곁에 별로 없을 때 더욱 그렇게 되기 쉽다. 강연호 시의 주체는 그것이 "주절주절한 변명"임을 정확히 꿰뚫어 본다. "대체로는 무엇을 알겠다는 건지 얼버무리는" 태도임을 안다. 당연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자기 성찰과 거리 두기가 되기 때문에 자기 경험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이런 성찰이 가능한 것이겠다.
(······)
"수제비 뜨는 저녁"으로 상징되는 일상을 마주하고 살아가면서 시의 주체는 새삼 깨닫는다. 기를 쓰고 용을 써 봐도 "그래 봤자 뭉개고 치대고 찢고 떼고 뜯어내는 게 다라서" "둥글고 펑퍼짐하게 떠오"르는 수제비처럼 사는 것도 그와 별다를 게 없음을 말이다. 수제비는 "아무리 뜨거워도 국물과 함께 훌훌 감추듯 삼켜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사는 것도 다르지 않음을 이미 알아 버린 시의 주체는 "눈물이 아니라 수제비 얘기"임을 여러 차례 강조하지만 "청천벽력"과 "용맹정진"의 시간을 지나 마주하고 있는 수제비 뜨는 저녁이 한편으로는 눈물 나게 서러운 것이겠다. 이 서러움은 절정을 지나왔음을 아는 이의 서러움이다. (p. 시 66-67/ 론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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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 2022-여름(80)호 <오늘의 시인/ 신작시/ 작품론>에서
* 강연호/ 1991년『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비단길』『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기억의 못갖춘마디』
* 이경수/ 문학평론가, 199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주요 저서『불온한 상상의 축제』『바벨의 후예들 폐허를 걷다』『춤추는 그림자』『이후의 시』『너는 너를 지나 무엇이든 될 수 있고』『백석 시를 읽는 시간』『아직 오지 않은 시』(공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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