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박철영_계절의 전언과 시적 상상력(발췌)/ 나무 독경 : 이령

검지 정숙자 2022. 9. 10. 03:20

 

    나무 독경

 

    이령

 

 

  화서 화경 편평 꽃차례로 곧 만개하겠다

  꽃부리들 수런거리며 이 계절을 필사하듯

  환희의 축포를 뾰족 장전 중이다

  이슬점 아래 응결된 표정과 외침들이

  살아낸 일과 살아갈 촘촘한 다짐들이

  어쩌면 저 맹렬한 입술들을 데려왔을까

  서로의 해태로 무너졌을 흔적들

  피고 지다 돌아서서 깨어나 수유하는 배태들

  층층 겹겹 시간의 저 혁혁한 풍경 사이

  가고 오는 이치도 서둘러 가늠 없으니

  저 설법엔 사람도 글자도 경계도 없다

  햇살은 실가지 사이사이 습한 기억을 다독여서

  갈피 들추며 가멸차게 허공을 밀어올린다

  엽축 정생 결각하며 무언의 가르침을 방사 중인 나무

  그 아래 깨단하는 너라는 나!

  저 무해한 수많은 화포는 서둘러 오고

  유해한 힘의 총성은 가라

  나무는, 품어 온 묵언의 가슴 허공에 부려놓고

  향기로운 말씀 한 축 되어 속 울림

  넌출넌출 설파 중이다

    -전문, 『시와사람』 2022-여름호

 

  계절의 전언과 시적 상상력(발췌) _박철영/ 시인, 문학평론가

  풍경이 사유를 낳고 사유는 상상력을 연이어 충동한다. 모든 것의 중심은 꽃이지만, 감각의 채집은 고스란히 화자의 심상  안에 잠기게 된다. 화자는 꽃의 종류를 통해 피는 과정을 예의 관찰해온 것이다. 그것도 상당한 시간적 소요를 거쳐야 관찰할 수 있어 인내가 필요하다. 여하튼 화자는 꽃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고 그 이상으로 꽃에 대한 친밀감과 지극함을 보여준다. 한 송이의 꽃이 만개하기까지 과정에서 보여주는 형상을 교감적인 탐색으로 이뤄낸 전언의 필사인 셈이다. 그렇다고 단순하게 꽃이 전해오는 아름다움만 탐색하지 않는다. 매 시간마다 변화하는 세세한 꽃의 변이 과정을 식물성으로 국한하지 않고 인간의 의식으로 전화轉化해간다. 감성을 자극하는 꽃을 통해 발현하는 화자의 시적 환기는 꽃에 대한 기록만이 아니란 것이다. 한 송이의 꽃을 피우기까지 지난한 여정을 우리가 살아가는 삶으로 변주시켜간다. "꽃부리들 수런거리며 이 계절을 필사하듯"한 모양새는 화자가 가슴 안에 충만한 삶의 희열임을 알게 한다. 그렇게 시적 발화를 유발한 기제가 봄이 주는 생동과 그 생동감을 통해 전이된 환희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봄 이전 긴 동면을 통해 배태된 꽃눈의 분화가 갖는 고통의 시간마저도 화자도 똑같이 겪어왔음을 알 수 있다. 매번 달라지는 아슬아슬한 개화 환경을 '이슬점'으로 대변하고 있지만, 그 당시의 상황은 참혹한 것으로 생사의 갈림길이었을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도 생존에 대한 강렬한 욕망으로 현재의 시간을 이뤄낸 것이다. 보이는 아름다운 것들의 뒤에 가려진 참혹한 고통마저 극복해내야만 성취할 수 있는 "환희의 축포"는 아무나 터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말해준다. (p. 시 274/ 론 274~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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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와사람』 2022-가을(105)호 <지난 계절의 좋은 시>에서

   * 박철영/ 2002년『현대시문학』으로 시 부문 & 2016년『인간과문학』으로 평론 부문 등단, 시집『비 오는 날이면 빗방울로 다시 일어서고 싶다』『월선리의 달』『꽃을 전정하다』등, 평론집『해체와 순응의 시학』, 전자북 평론서 9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