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
진란
그녀는 우산도 없이
흰 서류 봉투를 가슴에 껴안고 서 있다
그녀가 바라보고 선 횡단보도에
초록불이 들어오고 사람들이 건너왔다
그녀가 그들을 향해 무어라 말을 시작했다
아무도 눈길 주지 않고
들어주는 이 하나 없어도
그녀는 입술에 힘을 주어 열심히 말했다
신호등이 바뀌었다
그녀는 입술을 여미고 다시 그 방향을
건너가야 할 사람처럼 기다렸다
무엇을 보는 걸까, 저 초점 흐린
다시 사람들이 건너왔다
흰 서류 봉투를 가슴에 꼭, 품은 채
또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그녀만 향해 비가 뿌려졌다
멈출 것 같지 않은 장마처럼
그녀는 지루하였다
그녀는 짓밟힌 장미처럼 허술했다
인권위원회 앞, 인도와 인도 사이의
비석이 된 그 여자
-전문 (p. 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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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의 하루
바람과 함께 하늘을 걸어가는 너랑
구름과 함께 바람을 걸어가는 나랑
지상에서 단 하루, 뜨겁게 피어날 수 있었다면
나중에, 아주 나중에 슬픔도 없을까
아주아주 오랜 후에 후회도 없을까
꽃은 자주 피어나고 숱한 꽃잎들 뛰어내리는데
떨리는 마음, 내 무덤에 숨겨두고
그리운 마음, 하늘에 흔들리면서
내가 가고 없는 조등에 무어라고,
나의 무엇이라고 쓸 수 있을까
그때에야 네 이름 석 자 쓰면서 이슬받이
기울여 추억한다고 하면 기쁠까
저 풀잎, 쉼을 얻지 못하고
저 바람, 멈춤을 구하지 않고
가슴에 묻어버린 네 눈동자와 네 숨소리와
너의 따스한 손과 어깨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면
한번 피었다 지는 저 가을꽃도 제 설움에 겨워
다시 꽃으로 피지 않으리라고
꽃으로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고
흐린 세상에 그런 말 남기고 싶어질까
-전문 (p. 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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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슬픈 거짓말을 만난 적이 있다』에서, 2022. 6. 30. <문학의전당> 펴냄
* 진란/ 전북 전주 출생, 2002년 계간 『주변인과 詩』 편집동인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혼자 노는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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