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간헐적 슬픔 외 1편/ 권순

검지 정숙자 2023. 10. 28. 02:34

 

    간헐적 슬픔 외 1편

 

     권순

 

 

  밤새 슬픔으로 떠돌다 돌아온 아침에는

  막막한 집 안에 낙타가 서 있다

  그가 있거나 없거나 덩굴장미는 피어나고

  휘파람새는 맑은 울음을 공중에 심는다

  안에서는 어제의 옷을 걸친 슬픔이

  발작처럼 돌아온다

 

  벽지와 천정이 맞닿는 거기에서 

  밤마다 피어난다

  끊어내려고 애를 쓸수록 억세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는다

 

  그의 음성을 기억하는 내 고막은

  귓전을 스치는 환청에

  아직도 청각을 곤두세운다

  이제 그가 없는 날들이 기억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를 모르던 시간처럼 밥을 먹고

  봄날처럼 웃고 겨울처럼 잠을 자고

  슬픔의 씨앗조차 없는

  그를 모르던 시간으로 돌아가서

  그와 간 적 없는 곳으로 여행을 갈까 한다

 

  슬픔을 담은 사람들이 사라지고

  들러붙는 허기가 슬픔을 이길 때

  홀로 고요해지려 한다

  바람이 등을 스쳐도

  쉽게 울지 않을 것이다

     -전문(p. 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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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의 별행본

 

 

  이번 생은 벌받는 기분으로 살아요

  받은 벌이 목에 걸려 있어요

 

  걱정만큼 벌어진 입속으로 벌레가 들어오고

  벌과 벌은 함께 날아오를 듯 달려들어요

  벌과 벌 사이에 혀가 끼어

  숨이 막힐 때도 있어요

 

  수백 옷을 갈아입고

  수백 번 유리 그릇에 성찬을 바치고도

  누대로 이어온 이 벌을 면할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요

  문벌도 학벌도 빈약하여 누대로 벌을 서는 핏줄들

 

  불행의 순간은 매번 다른 얼굴로 찾아오고

  아직 보지 못한 별행본을 스스로 찍어봅니다

 

  벌어져요 나와 나의 벌이

  벌이라는 말에 입이 벌어져요

 

  무릎 꿇고 앉아 벌을 서던 복도는

  너무 길고 어두워서 울음이 나왔어요

 

  혼자 남은 시간이 무서워 내뱉던 말들이

  내 혀를 짓누르고 있어요

 

  벌은 아직 내 목에 걸려 있고

  나의 벌은 하루의 뒤에 숨어요

     -전문(p. 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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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벌의 별행본』에서/ 2023. 10. 13. <상상인> 펴냄

  * 권순/ 2014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사과밭에서 그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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