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나사론(論) 외 1편/ 박미라

검지 정숙자 2023. 10. 25. 01:11

 

    나사論 외 1편

 

     박미라

 

 

  '볼트와 너트'를 '나사'라고 일러줬다. 뭐든지 다 알고 뭐든지 다 알게 했다.

  우산도 없이, 과꽃 모종을 들고 나서며 메밀 싹 같은 이슬비를 웃었다.

  세상이 떠넘긴 여러 개의 대명사를 지녔으므로 수시로 비틀댔다.

 

  틈만 나면 나사를 조이고 다녔다. 부엌에도 창문에도 내 종아리에도 나사가 박혀 있었다.

  가장 많은 나사를 조이고 조인 그이의 몸에서는 입을 틀어막은 어떤 것들이 불씨를 사르거나 탁탁 터졌다.

  사르다가 만 불씨에 그을려 사계절 내내 캄캄했다.

 

  시난고난 견딘 과꽃이 환해지면 배실배실 웃고 다녔지만, 다섯 살에 보낸 어린것이 별이 되었다는 건 믿지 않았다.

   

  도대체 그 많은 나사를 조이고 갔으면서 아직도 남았는지, 오늘은 내 손목에 나사를 조인다.

 

  이런, 그이가 두고 간 손이 내 손목에 달려 있었다.

 

  왜 자꾸 헐거워지니?

     -전문(p.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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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가 돌아왔다

 

 

  꽃 핀 나뭇가지를 흔들어보거나 저 혼자 깊어진 초록 이파리에 침을 뱉거나, 심심하다, 심심하다, 지나가는 바람에게 붉은 길을 들켰다 끊길 듯 이어진 저 붉은 길의 시원을 들쑤시고 묵은 제사에 다녀가는 오촌 당숙처럼 바람은 그저 지나가는데

 

  어디서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인가. 오래전 다녀간 파리가 돌아왔다.

 

  어떤 이름을 부를 때나 맑은 물에 헹구고 조심조심 깜빡여보던 눈 속의 붉은 길이 속절없이 드러났다.

  굳이 감추자는 것은 아니었다고, 그냥, 고단했다고 눙친다. 비문증이라는 버젓한 문패 뒤에서 쏟아져 나온 파리 떼를 감당하면서 잠깐 아득해진다. 떼거리라는 말은 밝은 세상에서도 무서워라.

 

  이미 노마드nomade 족의 신민이 된 나는 이 붉은 길들을 어떻게든 파묻을 것인데 돌아왔으니 돌아갈 곳도 있겠지. 

 

  길 없는 것들에게는 어떤 길도 무섭지 않아라.

     -전문(p.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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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파리가 돌아왔다』에서/ 2023. 10. 7. <달을쏘다> 펴냄

  * 박미라/ 1996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비 긋는 저녁에 조착할 수 있을까?』『울음을 불러내어 밤새 놀았다』『이것은 어떤 감옥의 평면도이다』『우리 집에 왜 왔니?』『안개 부족』『붉은 편지가 도착했다』『서 있는 바람을 만나고 싶다』, 산문집『유랑의 뼈를 수습하다』『그리운 것은 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