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심장 뛰는 인형 외 1편/ 정여운

검지 정숙자 2024. 10. 4. 03:01

 

    심장 뛰는 인형 외 1편

 

     정여운

 

 

  해질녘 그네에서 깨어났죠 저녁돌이 내게 사랑을 넣었나 봐요 가슴께에 빛바랜 얼룩이 선명했죠. 나는 오늘부터 사랑을 하기로 했죠 가끔 모래바람이 불어도 숨바꼭질처럼 꼼짝하지 않았어요 밤이 되면 바다는 동화를 들려주었어요 푸른 요정을 만난 인형은 사람이 된다고요 나는 꿈을 가졌어요 진짜가 되고 싶었어요

 

  누군가 나를 잠깐 들었다가 내려놓았어요 사랑을 가득 받고 싶었어요 거슬리는 실밥을 없애면 너를 좋아할 거야 바람에게 실끝을 주었어요 왼쪽 팔이 풀려서 약간 덜컹거려요 나는 버림받은 걸까요 아무도 없는 백사장에서 수평선을 잡고 매달렸어요 요정을 만나면 정말 사람이 될 수 있나요? 너는 재활용 수거함에 가야 할 거야 진짜가 아니어서 미안해요 하지만 꼭 진짜가 될게요 제발 날 버리지 마세요  

 

  파도가 들이칠 때마다 조금씩 움직였어요 모래밭에 내려와 포말 있는 곳까지 갔어요 바다님, 저를 진짜로 만들어주세요. 다시 사랑을 받게 해주세요 해님 달님을 보면서 큰 너울 속으로 잠겼다 떴어요 대륙 너머 무지개다리가 보였어요 차갑고 깊은 잠속으로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어갔어요

 

  여기는 어디인가요?

  까만 피부의 아이가 나를 끌어안아요

  내 가슴에 볼을 가만히 대고 있어요

  심장 소리가 나요

      -전문(p. 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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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슨 /글라디올러스

 

 

  글라디올러스가 요에 붉고 노랗게 피어 있었다

  

  죽을 때가 되면 안 하던 짓을 한다카더마는 인자 너그 아부지가 죽을랑갑다

  오줌 싸는 것도 모자라서 피똥까지 싸니 내가 죽을 지경이다

 

  등 굽은 노모 입에서 맵찬 바람이 불었다

 

  꽃밭에 키 큰 측백나무 두 그루가 누렇게 말라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채송화와 제비꽃에 물을 주고 있다

 

  사방으로 흩어진 스테인리스 양푼이에 아버지의 오줌이 찰랑거렸다

 

  오줌통을 턱 밑에까지 갖다 줘도 와 맨날 그릇에다 오줌을 싸노 말이다

  내가 너그 아부지 오줌을 먹은 게 한두 번이 아이다

 

  방 안에서 벽지만 뜯고 있던 아버지는 엉덩이로 꽃동산을 만들었다

 

  이게 뭐꼬? 고마 죽으면 편할 낀데,

  자는 잠에 가야  될 낀데 너무 오래 살까 봐 걱정이다

  너그 아부지 두고 내가 먼저 죽으면 천덕꾸러기 되는데 우짜노

 

  어머니는 침대 머리맡에 족자를 걸어놓고 매일 염불처럼 외웠다

 

  자리 만 자리 내 침수寢睡에 맞는 자리

  황금을 뿌린 자리 불보살님 닿는 자리

  이내 일신 갈 적에는 좋은 날 좋은 시에

  자는 잠에 고이 가게 하시옵소서*

 

  이따금 찬바람이 와서 마당을 쓸어주고 갔다

  뜰아래 꽃들이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글라디올러스가 요에 붉고 노랗게 피어 있었다

     -전문(p. 18-19)

 

     * 갓바위 어느 노보살의 발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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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녹슨 글라디올러스』에서/ 2024. 6. 30. <지혜> 펴냄

  * 정여운鄭餘芸/ 경북 대구 출생, 2013년『한국수필』로 수필 부문 & 2020년『서정시학』으로 시 부문 등단, 시집『문에도 멍이 든다, 詩에세이집『다알리아 에스프리』, <새얼문학>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