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발톱꽃과 나의 현/ 박잎
<에세이 한 편>
매발톱꽃과 나의 현
박잎/ 시인
내 영혼의 비할 길 없는 황량함을 매일 꿈속에서 만난다. 황량함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풀어헤쳐진 잔혹함이라고 해야 할까. 이 잿빛 미망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가슴을 진정시키려 두 눈을 감는다. 막막한 어둠 속, 홀로 가닿는 마지막 풍경은 말이 떨어져 누운 절벽이다. 어디선가 파도 소리 가없이 들려오지만 기이하게 바다가 보이지 않는 절벽. 그 절벽 아래 말이 홀로 누워 있다.
오랜만에 명월리 종점에 갔다. 보랏빛 엉겅퀴에 나비가 하얀 나비가··· 날개에 아주 쬐그마한 노랑 꽃잎을 묻히고 하늘하늘 앉아 있었다. 변두리 빈터. 한낮의 색감은 어쩌자고 이리 아름다운가. 더더욱 절망하며 '명월상회' 앞에 이르니, 개울가에 꽃이 있었다.
옅은 자줏빛 매발톱꽃이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흔들리고 있었다. 고개 숙인 꽃잎을 살포시 들춰 보니, 노오란 매발톱 형상이 보석처럼 박혀 있었다.
잊어야지, 겨우 꿈이잖아
쓸쓸히 마음을 다독이며 난 세상에서 들었던 아름다운 들을 떠올려 보았다. 파초, 소라고둥, 모래알, 강아지풀, 모두 사랑하는 말이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낮게 일렁이며 맺혀있는 말은 아들 현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아주 어릴 때 봉선화 핀 시골 놀이터에 누워 흙을 집어삼키던 아이. 열 살쯤이던가. 첩첩 책으로 둘러싸인 방. 겨울밤 현이가 이불 속에 몸을 폭 집어넣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엄마, 내가 존경하는 작가가 누군지 알아요?"
"안데르센? 권정생?"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뜻밖에도 현은 내 이름을 조그맣게 말했다. 연이어 등단에 실패하고 외롭게 글을 쓰고 있던 나날이었다. 소스라치는 감동이 밀려왔다. 돌이켜보니 생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그날의 떨림을 어찌 잊으리.
어느 날 산책길에 덩그러니 누운 길고양이를 잡목림 근처로 안고 가 풀을 덮어줬다는 현. 집에 와서 손을 씻을 때 아직 따스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고.
따뜻한 말들은 너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갑자기 개울가에서 마음이 행복해진다. 사르르 햇살에 어젯밤 악몽이 녹아내린다. 숱한 광풍이 사라지고 그의 말 때문에 내 영혼에 산들바람이 분다.
오늘, 여기, 종점. 매발톱꽃 옆에서. ▩ (p. 22-24)
----------------------
* 수필집 『툰드라백조 깃털을 아세요?』 2024. 9. 5. <푸른사상> 펴냄
* 박잎/ 2017년『월간 시』로 등단, 시집『꿈, 흰말』『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산문집 『새에 이르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