툰드라백조 깃털을 아세요?/ 박잎
<에세이 한 편>
툰드라백조 깃털을 아세요?
박잎/ 시인
어슬렁어슬렁 흰 고무신을 신고 낭인浪人처럼 풍물장을 거닐던 내가, 좌판을 펼친 날의 기분을 뭐라 말해야 할까.
윈추리며 완두콩이며 머우며 고구마줄거리를 늘어놓고 온종일 장바닥에 앉아 있는 할머니들 틈에서, 나는 처음으로 내가 젊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희끗희끗 늘어나는 흰머리를 보며 어쭙잖은 신세 한탄을 늘어놓던 나. 몸빼바지에 허술한 잠바를 입은 옆 할머니의 벗겨진 양철 도시락을 보고 있자니 콧등이 찡했다. 낡은 도시락 뚜껑엔 다람쥐가 그려져 있었다.
고도다 방드르디다 쿳시다 내가 꿈을 쫓는 동안, 그녀의 하루는 저렇게 저물었겠지··· 빛나는 여름 햇살 아래서 자신을 불태웠겠지··· 자식들을 키웠겠지.
나는 준비해 온 비누를 조심스럽게 늘어놓았다. 가뭇없이 손끝이 떨렸다. 여드름, 탈모에 좋다는 어성초 비누. 여러해살이풀. 메밀꽃 비슷한 흰 꽃을 피워 약모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잔잔한 흰 꽃 가운데 초록색 수술이 앙증맞게 솟아있다. 잎과 잎과 줄기에서 비린내 냄새가 난다고 어성초라고 불린다. 따뜻하게 녹인 비누 베이스에 어성초 분말 1그램, 글리세린 약간, 라벤더 오일 열 방울을 꽃모양 틀에 부어 굳히면 향긋한 밤색 비누가 탄생한다. (p. 96-97)
말린 카렌듈라 꽃을 송송 넣은 노란 허브 비누, 파란 식용색소를 넣은 고양이 비누, 파프리카 비누, 치자 비누, 맥반석 비누,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다 비누! 처음 연초록빛 바다 비누를 만들었을 때의 설레임이 잡힐 듯 생생하다.
우선 흰 베이스를 조금 녹여 쪼그마한 조개, 소라, 불가사리 틀에 살살 부어 굳힌다. 다음 모래사장 만들기. 해묵은 나무도마에 경사지게 네모난 비누틀을 놓고, 노니분말로 모래색을 낸 뒤 적당히 굳으면 그 위에 조개, 소라, 불가사리를 얌전하게 얹는다. 모래가 조개가 굳어 식을 때쯤 연초록빛 바다색을 그득 붓는 것이다.
비누 속에 해변의 꿈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나는 탄성을 지르며 캔맥주를 사 왔다. 한갓 초록비누 속 모래밭과 부가사리에서 피어나는 감성의 물결, 물결들! 문득 내가 지나온 모든 바다가 환등처럼 스쳐갔다. 쓸쓸한 서해, 갈매기 푸드득 깃을 치던 동해가··· 해당화 소담스런 화진포 바닷가로 당장 달려가고픈 충동이 일었다.
숱한 인파가 비누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휙휙 지나갔다. 나는 속절없이 바다 비누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무료함에 연습장을 펼치고 눈 밑에 깨알점이 있는 소녀와 꽃을 그렸다. 이제 오십 대 중반. 나는 아직도 현실적이지 못하고 사람 대하는 일이 무척 서툰 편이다. 누군가는 이런 날 보면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는 소월의 시가 절로 생각난다고 했다.
조금씩 세파에 부딪히는 나를 느낄 때마다 스케치북에 꽃과 소녀를 그리고, 마음이 거칠어지려 할 때마다 공책을 펴고 적는다. 라벤더, 물방울, 라벤더, 물방울. 아름다운 것들을 상상한다.
깊은 상념에 잠겨있을 때, '내가 주를 처음 만난 날··· ' 찬송가가 장터에 울려 퍼졌다. 눈을 드니 안은뱅이 할머니가 거의 목판에 몸을 누이고, 바퀴를 굴리며 시멘트 바닥을 나아가고 있었다. 옥수수 수염 같은 흰 머리칼을 질끈 묶고 박카스 종이 박스 통에 돈을 구걸하고 있었다. 낡은 목판 위에는 옛날 크림빵 두 개가 고무줄로 칭칭 묶여 있었다.
명치끝이 타들어가는 듯, 순간 할머니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나는 당황하여 주섬주섬 준비해 온 잔돈,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종이통에 넣었다. 까닭 없이 심장이 고동쳤다. 흐린 눈동자 할머니는 연신 고개를 내게 숙이셨다. 황송스러울 정도의 인사에 귓불이 붉어졌다. 바퀴야, 바퀴야··· 녹내장이 걸렸다며 옆 할머니는 나물 소쿠리를 엎어뜨리고, 앉은뱅이꽃 그 할머니는 온종일 시장바닥을 헤치고 나아갔다.
'인생의 어려운 순간마다 주의 약속 생각해 보네.' 구슬픈 가락에 마음이 몹시 흔들렸다. 할머닌 눈이 마주칠 때마다 지친 웃음에 고개를 숙여주셨다. 늘상 보는 풍경이라 그런지 돈을 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같은 햇빛을 받으며 어떤 이는 향락에, 어떤 이는 남루의 수렁에 한없이 빠져든다. 오늘 처음 좌판을 벌인 이 장터 앉은뱅이꽃 할머니가 건너온 세상은 어떤 질감일까. 할머니께 난 즉석에서 마음속 시를 바쳤다.
찬송가를 틀고 할머니가 바퀴를 둘렸네
앉은뱅이꽃,
아무도 곱다 돌아보지 않았네
머리칼은 대둥지마냥 푸석하고,
눈동자 잿빛으로 저물었네
할머니 산호초를 아세요?
할머니 툰드라백조 깃털을 아세요?
할머니 혹시 보르헤스를 아세요?
아니 아니
우리 풀솜할머니는 알고 있어요
취 향기를, 질경이를, 익모초를
노지씀바귀를요
할머니 저 멀리서 원추리꽃이 흔들려요
할머니는 한낮 장터 여왕이랍니다.
비누가 스무 개 팔렸다. 떨리는 손으로 돈을 받고 집에 돌아와 누우니 느닷없이 귀울림이 일었다. 파란 장에 갇힌 새의 잔상이 흘러갔다. 또 잊을 수 없는 작은 바퀴와 연한 맨발··· 짙은 슬픔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할머니, 당신은 썰물에 남겨진 모래 속 진주알. 왠지 보고싶네요. ▩ (pp. 9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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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집 『툰드라백조 깃털을 아세요?』 2024. 9. 5. <푸른사상> 펴냄
* 박잎/ 2017년『월간 시』로 등단, 시집『꿈, 흰말』『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산문집 『새에 이르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