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집에서 읽은 시
일침/ 이희승
검지 정숙자
2024. 9. 18. 02:03
일침
이희승
고래를 잡는다 얼마나 잡았냐고 땅 위에 있는 시간보다 바다에 있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지 땅 위에 서면 멀미가 나지
돌고래 따윈 잡지 않아 귀신고래만 잡지 참고래 말이야 참고래는 분기를 내뿜어 한눈에 알 수 있어 엔진을 꺼야만 해 달아날지 모르니 노를 저어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만 놈이 눈치채니까 꼬리지느러미를 움직일 즘 작살포를 조준하는 거야 심장부를 정확하게 내리꽂지 이리저리 날뛰는 모습이 성난 파도 같지 배가 뒤집힐 정도야 난, 딱 작살 하나만 꽂지
장수경이란 놈이 문기를 일으킬 텐데 오힐 반들거리며 살짝 물 위에 비치는 거야 숨을 쉬려 떠올랐던 거지 엔진을 껐어 하지만 놈의 눈과 마주치고 말았지 놀란 건 나였어 엉겁결에 작살포를 당겼지 밧줄이 풀리기 시작했어 한없이 풀리는 거야 갑판에 동여맸더니 얼마나 배가 요동치는지 비는 내리고, 너울은 다가오고, 키를 잡고 전속력으로 배를 몰았지만 갑자기 축 처져버리는 느낌이었어 그때 놈은 다시 생기를 되찾았어 팽ㅡ 하는 소리 다들 포기하자고 밧줄을 끊자고 했지만 마지막 작살포를 쏘았지 발사되는 순간, 작살포 밧줄에 감겨 놈 위로 날아갔어 놈이 사는 곳까지 쭉 내려갔지 그 후로 난 수면 위로 오른 적이 없어
난 땅 위에 있으면 멀미를 느끼니까
-전문(p.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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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목문학 제6집 『물을 돌리다』에서/ 2024. 7. 30. <파란> 펴냄
* 이희승/ 2023년 『계간문예』를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