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이찬_"지평선의 아름다움"(발췌)/ 사령(死靈) : 김수영

검지 정숙자 2024. 9. 12. 20:27

 

    사령死靈

 

    김수영(1921-1968, 47세)

 

 

  ······ 활자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아라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아라

  이 황혼도 저 돌벽 아래 잡초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도

  행동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에서는

  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아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전문-

 

  ▶"지평선"의 아름다움_ 『中庸』으로 김수영 읽기(발췌) _이찬/ 문학평론가

  「사령」은 『중용』 '章句' 제1장에 나타난 '莫見乎隱막견호은 莫見乎微막견호미 故君子愼其獨也고군자신기독야'는 "드러남이 없으며 나타남이 없으니, 그러므로 君子는 그 홀로를 삼가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통해, 좀 더 내밀한 차원에서 감수될 수 있을 듯하다. 이 시편은 '신독愼獨'의 구체적 감각과 당면한 수행의 어려움을 역설 어법으로 소묘한 것처럼 보인다. '신독은 고독이지만 폐쇄가 아닌 개방이다'라는 한 철학자의 말에 집약된 것처럼(김용옥, 『중용   인간의 맛』), 그것은 우선 '남이 보지 않는 데서 계신戒愼하고 공구恐懼하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나날의 우여곡절들 속에서도 '중용'의 도'를 쉼 없이 홀로 닦고 또 닦는 내면적 절차탁마切磋琢磨 과정에 빗대어질 수 있겠다. 

  「사령」에서 형상화된 '나의 영'이란 '신독'의 수행 과정으로서의 "나", 곧 "나"라는 주체를 성찰하고 심화하는 부단한 실천 과정을 암시하는 시어가 분명하다. 또한 "나"의 유한성과 불충분 속에서도 '도'를 추구하는 '중용'의 실천 지평을 그 심부의 곡절들을 어렴풋이 비추는 등불처럼 걸어 놓는다. 1연의 "활자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는 세계의 무수한 문자 문명과 더불어, 그것으로 이루어진 인류의 지식과 담론이 새롭게 해석되고 발명되는 창조적 지평을 암시한다. 마찬가지로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이를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태와 무능을 자책하는 이미지로 해석된다.

  따라서 "활자"라는 하나의 작은 형상이 인류의 문명과 지식 전체를 대리-표상하는 제유提喩의 형상으로 기능한다면, 그것의 목적어와 서술부를 이루는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는 기왕의 통념젹 지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해석과 미지의 담론이 탄생하는 획기적 발명과 새로운 창안의 순간을 포착한 이미지일 것이 자명하다. 마찬가지로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자유"로 표상되는 새로운 진리와 창조적 담론의 진화 과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힐문詰問이자 자괴감을 표현하는 형상으로 읽힌다. (p. 시 116-117/ 론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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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파란』 2024-여름(33)호 <serial / 文質彬彬> 에서    

  * 이찬/ 문학평론가, 2007년《서울신문》신춘문예를 통해 비평 활동 시작, 저서『현대 한국문학의 지도와 성좌들』『20세기 후반 한국 현대시론의 계보』『김동리 문학의 반근대주의』, 문학비평집『헤르메스의 문장들』『시/몸의 향연』『감응의 빛살』『사건들의 예지』, 문화비평집『신성한 잉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