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호스피스 임종병실/ 황길엽

검지 정숙자 2024. 9. 7. 01:53

 

    호스피스 임종병실

 

     황길엽

 

 

세상 향한 바쁜 걸음들이 또 하루살이로 허물어지는 날

푸른 숲은 숲대로 눈부신데 펜 끝은 무디어집니다

 

생은 까마득하게 걸어왔던 길에서 한 뼘쯤으로 접혀져오

는 거리로 멈춥니다

 

열정과 욕망이 뜨거웠던 삶의 흔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서 수십만 번을 오르고 내리는 발걸음만 보다가 웃자라버

린 시간, 하얗게 바래진 병실에는 기억 속에 머무를 오늘

을 밀고 갑니다  

 

가끔씩 몰아쉬는 마지막 숨소리가 무겁게 창문에 매달려

영혼은 거리를 좁히고 가볍게 등 뒤에서 차마 내려놓지

못한 초점 잃은 눈동자에는 세상 인연들 하나하나 담으려

다 풀어집니다

 

공기처럼 가벼이 또 한 사람이 떠나고,남아 있는 흔적 털

어내며 병실을 비워내는 것은 슬픔이 커지는 마지막 시간

을 걷는 것입니다

 

오늘도 호스피스 병실에는 또 다른 이승의 마지막 이별

준비를 합니다

    -전문-

 

  추천글> 한 문장: 황길엽의 시는 정답과 오답 사이에서 파생하는 다채로운 갈등이다. 그렇다, 아니다 혹은 직선 방정식이다 질량보존의 법칙이다 이론들이 많다. 물론 시는 이러한 수학이나 물리학에서 요구하는 정답은 없다. 시에 대해서 정의를 내릴 수 없고 시인 역시도 공식의 발명을 위해서 시를 쓰지는 않는다. 황길엽 시인의 시편에 따르면 삶은 공식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공식을 지워나가는 과정일 것이다. 하나의 공식은 한 갈래의 길에 해당한다. 길은 수정액으로 지운 듯 하얗게 지워져 있다. 소멸의식이다.

                 *

  "초점 잃은 눈동자에는 세상 인연들 하나하나 담으려다 풀어지는/ 생의 마지막 순간"(「호스피스 임종병실」). 그 순간에 떠오르는 질문과 해답은 무엇이었을까. 시인의 영혼을 닮은 새들은 하늘과 지상을 오가며 자신만의 길과 자신만의 정답을 구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같이 황길엽의 시편들은 삶의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철학적 대웅이란 점에서 그리고 새로운 사유 체계의 또 다른 방식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저 어두운 곳에서 조용히 빛을 발하는 별과 같다. (p. 시 36/ 론 116 * 117) <이성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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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가끔 부재중입니다』에서/ 2024. 8. 3. <시작> 펴냄

  * 황길엽/ 1991년 『한국시』 로 등단, 시집『도회에서 띄우는 편지『길은 멀지만 닿을 곳이 있다『가고 없는 사람아』『비문을 읽다』, 『아주 먼, 혹은 까마득한』『무심한 바람이 붉다』 부산작가회의 · 부산시인협회 ·  화전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