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경찰서 뒷마당 나무 의자에 앉아 외 1편/ 나금숙
우리는 경찰서 뒷마당 나무 의자에 앉아 외 1편
나금숙
우리는 경찰서 뒷마당 나무 의자에 앉아
우람한 근육에 검은 선글라스를 쓴
젊디젊은 후배 형사들을 바라봅니다
오늘은 당신이 35년 근무에 마침표를 찍는 날,
아! 당신도 저리 늠름했었는데
그때는 동생들도 많이 거느렸었는데
지금은 마중 나온 후배 하나 없고
상관의 전화 한 통 없군요
삼십 대 후반에 두 번 수술한 뇌종양이 다시 도져서
3차 수술을 한 당신을
등 떠밀어 내보내는 날,
좁은 경찰서 뒷마당으로 초조하게 드나드는 범죄자의 가족들,
그들이 졸아붙어 애원하는 그 방 앞에서 우리도
퇴직 서류에 도장 찍는 걸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성한 아들들은 타국으로 나가고
딸은 사는 일이 여전히 바빠서
정복 입은 사진 한 장 찍어 줄 사람 없는데
눈길에 쓰러져 가며 막내 대학 졸업까지는 다닐 거라고,
내가 80년대 데모 막느라고,
범인들 잡느고 어떤 고생을 했는데!!
나도 근무할 권리 있다고!!
3월이면 청문관이 와서 퇴직을 강요할 때마다
왼쪽이 마비된 몸을 떨어 가며 호령하던 당신
오늘 말없이
절룩거리며 자판기 커피를 뽑아다 내게 내미는 당신
꽃다발 하나 없이
열 번 태어나도 경찰을 하겠다던 천생 경찰인 당신을
정의로운 당신을 밀어내는 이 큰 무엇 앞에서
단지 곁에 있는 주는 것 외엔 해 드릴 게 없는 아내가
별점 하나 없는 영예로운 근무를 치하드리고
퇴직을 축하드립니다
내가 꽃다발이 되어드리고
내가 표창장이 되어 드릴 테니
오래오래 곁에 살아 주기만 하소서
-전문(p. 10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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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나무 아래서 나 그대를 깨웠네
사과나무 아래서 그대는 나를 깨웠네
나무 아래 사과들은 해거름에 찾아오는
젖먹이 길짐승들의 것
꿈에서 깨어도 사과나무는 여전히 사과
베이비 박스 속의 어린 맨발은
분홍 발뒤꿈치를 덮어 줘야 해
쪼그맣게 접은 메모지에
네 이름은 사과
그러나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
지을 때까지 지어 보려는
파밀리아 성당처럼
사과들은 공간을 만들고
구석을 만들고
지하방을 만들고
삼대의 삼대 아비가 수결한 유언장 말미의 붓자국처럼
희미한 아우라를 만들고,
산고를 겪는 어미의 거친 숨결이
사과나무 가지 사이로
새로운 사과를 푸르게 푸르게 익혀 가는 정오쯤
우리는 비대면을 위해 뒤집어쓴 모포를 널찍이 펼쳐서
하늘을 받는다 하늘의 심장을 받는다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
-전문(p. 30-31)
* 르네 마르리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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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사과나무 아래서 그대는 나를 깨웠네』에서/ 2024. 8. 9. <시작> 펴냄
* 나금숙/ 전남 나주 출생, 2000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그 나무 아래로』『레일라 바래다주기』, 공동 시집『1인의 노래』4, 5, 6, 7권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