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모란/ 나금숙

검지 정숙자 2024. 9. 4. 15:29

 

    모란

 

    나금숙

 

 

  모란에 갔다

  짐승 태우는 냄새 같기도 하고

  살점 말리는 바람 내음 같은 것이 흘러오는

  모란에 가서 누웠다

  희게 흐르는 물 베개를 베고

  습지 아래로 연뿌리 숙성하는 소리를 들을 때

  벽 너머 눈썹 검은 청년은 알몸으로 목을 매었다

  빈방엔 엎질러진 물잔, 물에 젖은 유서는

  백 년 나무로 환원되고 있었다

  훠이 훠이 여기서는 서로가 벽을 뚫고 지나가려 한다

  서로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나온다

  어른이 아이가 되기도 하고

  여자가 남자가 되기도 한다

  한낮 같은 세상을 툭 꺼 버리지 말고

  그냥 들고 나지 그랬니

  무덤들 사이에 아이처럼 누워

  어른임을 견딜 때,

  궁창의 푸른 갈비뼈 틈에서 솟는 악기 소리

  먹먹한 귓속에 신성을 쏟아붓는다

  슬픔이 밀창을 열고

  개다리소반에 만산홍엽을 내오는 곳

  모란에 가서 잤다

  오색등 그늘 밑에서 잤다

  내력들이 참 많이 지나가는 곳에서

  사람의 아들, 그의 불수의근을 베고 잤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시인은 왜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는 모란에 눕는 것인가. 시적 상징 공간인 모란에서는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에 젖은 유서"가 "백 년 나무로 환원"되는 것이 모란이다. 시적인 것은 경계를 무화시킨다. 시적 장소인 모란은 "서로가 벽을 뚫고 지나가려" 하고 "서로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나"올 수 있는 곳이다. 하여, 모란은 남녀와 장유가 뒤바뀔 수도 있는 곳이어서 시인은 "무덤들 사이에 아이처럼 누워/ 어른임을 견"디는 중이다. 죽은 자들이 저승과 이승의 경계를 뚫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이 모란에서는, 시인은 어른을 벗어나 아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아이가 된다는 것은 세계를 새로이 보고 이름 짓기를 하는 존재자, 즉 시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시의 마지막 행을 보면, 그 슬픈 신성은 죽임을 당한 예수    ' 사람의 아들'    와 관련 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예수는 신의 아들이지만, 한편으로 사람    '마리아'    의 아들이기도 하다. 사람의 아들'을 예수로 읽는 것은 앞에 '신성'이라는 시어가 나오기 때문이다. 모란에서의 잠은, 그렇다면 예수의 "불수의근을 베고" 자는 일이겠다. 그런데 '불수의근'이란 말이 낯설다. 검색해 보니 '의지와 관계없이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근육'이라는 뜻이다. 내장의 근육이나 심장의 근육이 그러한 근육이다. 사람의 아들 예수 역시 죽은 자이기에 육신인 심장은 기능을 멈췄을 터, 하지만 '불수의근'은 여전히 스스로 움직이고 있다. 이렇게 시인은 '사람의 아들' 예수의 심장 근육을 베고 누워 죽음이 이곳으로 넘어오는 모란에서 슬픈 신성의 소리를 듣는다. 이 소리가 바로 시의 소리 아닐까. 그렇다면 이 소리를 붙잡아 언어화하는 것이 시인이 할 일, 그래서 시인은 이 모란에서 잠을 자는 것일 테다. (p. 시 13-14/ 론 142-143 · 143-144) <이성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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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사과나무 아래서 그대는 나를 깨웠네』에서/ 2024. 8. 9. <시작> 펴냄

  * 나금숙/ 전남 나주 출생, 2000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그 나무 아래로『레일라 바래다주기』, 공동 시집『1인의 노래』4, 5, 6, 7권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