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이구한_실존의식과 존재의 현상(발췌)/ 국어선생은 달팽이 : 함기석

검지 정숙자 2024. 9. 1. 02:57

 

    국어선생은 달팽이

 

     함기석

 

 

  당나귀 도마뱀 염소, 자 모두 따라해!

  선생이 칠판에 적으며 큰소리로 읽는다

  배추머리 소년이 손을 든 채 묻는다

  염소를 선생이라 부르면 왜 안 되는 거예요?

  선생은 소년의 손바닥을 때리며 닦아세운다

  창 밖 잔디밭에서 새끼염소가 소리친다

  국어 선생은 당나귀

  국어선생은 도마뱀

  염소는 뒷문을 통해 몰래 교실로 들어간다

  선생이 정신없이 칠판에 쓰며 중얼거리는 사이

  염소는 아이들을 끌고 운동장으로 도망친다

  아이들이 일렬로 염소 꼬리를 잡고 행진하는 동안

  국어선생은 칠면조

  국어선생은 사마귀

  선생이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소리친다

  당장 교실로 들어오지 못해? 이 망할 놈들!

  아이들은 깔깔대며 더욱 큰소리로 외쳐댄다

  국어선생은 주전자

  국어선생은 철봉대

  염소는 손목시계를 풀어 하늘 높이 던져버린다

  왜 시계를 던지는 거야? 배추머리가 묻는다

  저기 봐, 시간이 날아가는 게 보이지?

  아이들은 일제히 시계를 벗어 공중으로 집어던진다

  갑자기 아이들에게

  오전 10시는 오후 4시가 된다

  아이들은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선생이 씩씩거리며 운동장으로 뛰쳐나온다

  그 사이, 운동장은 하늘이 되고

  시계는 새가 된다

  바람은 의자가 되고

  나무들은 자동차가 된다

  국어선생은 달팽이!

  국어선생은 달팽이!

  하늘엔 수십 개의 의자가 떠다니고

  구름 위로 채칵채칵 새들이 날아오른다

  구름은 아이들 눈 속으로도 흐르고

  바람은 힘껏

  국어책과 선생을 하늘꼭대기로 날려보낸다

    -전문, 시집 『국어선생은 달팽이』, 1998, 세계사

 

 실존의식과 존재의 현상_장 폴 사르트르의 관점에서(발췌) _이구한/ 시인 · 문학평론가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프, 1930-2002, 72세)는 "예술의 경험이란 자연의 창조의, 즉 소산적所産的 자연이 아니라 능산적能産的 자연의 자유로운 모방이고, 그것에 의해 예술가는 창조적 천재의 구성법칙에 따르는 '또 다른 자연'을 만들어냄으로써 소산적 자연에 대한 자기의 초월성을 주장하게 되는데, 이러한 경험은 본원적 직관이라는 신의 경험에 가까운 것이다. 예술적 창조가 만들어내는 세계는 '또 다른 자연'일 뿐만 아니라 '반자연'이기도 하다,"11)고 강조한다.

  배추머리 소년은 "염소를 선생이라 부르면 왜 안 되는 거예요?"하고 묻는다. 이 세상은 염소를 선생이라 부르면 안 되나요? 라고 묻지 않는다. 그러면 안 되는 세상이라는 건 다 아니까 말이다. 왜 안 되나요? 하고 이유를 묻는다. 선생은 소년에게 이해를 위해 설명을 해준다거나 설득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그런 건 묻는 일이 아니라는 듯 손바닥을 때린다. 이게 기존의 교육 방법이다.

  새끼염소가 소리친다. "국어선생은 당나귀/ 국어선생은 도마뱀" 상상력이 좋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염소이다. 그것도 염소 중에서 염소 새끼다. 아이들이 운동장으로 나와 일렬로 염소 꼬리를 잡고 행진한다. "국어선생은 칠면조/ 국어선생은 사마귀" 선생은 창문을 열어젖히며 소리친다. "당장 교실로 들어오지 못해? 이 망할 놈들!"

  지금까지 기표를 해체하던 상황은 더 심오해진다. 염소는 손목시계를 풀어 하늘 높이 던진다. 아이들도 일제히 시계를 벗어 공중으로 집어던진다. 시간도 이 세상 제도가 만들어 놓은 것이다. 시간을 해체하고 현상계 너머 예지계로 진입하고자 한다. 예지계는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초감성적 장소이다. (p. 시 234-236/ 론 236-237)   

  ----------------

  * 반년간 『미당문학』 2024-하반기(18)호 <문학 평론> 에서

  * 함기석/ 1992년『작가세계』로 등단, 시집『디자인하우스 센텐스』국어선생은 달팽이』『오렌지 기하학』외

  * 이구한(본명:이광소)/ 1942년 전북 전주 출생, 1965년 <문공부 신인예술상> 시 부문 당선 & 2017년『미당문학』으로 문학평론 부문 당선, 시집『약속의 땅, 서울』『모래시계』『개와 늑대의 시간』『불타는 행성이 달려온다』, 평론집『착란의 순간과 중첩된 시간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