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가을단서/ 김영미

검지 정숙자 2024. 8. 30. 17:37

 

    가을단서

 

     김영미

 

 

  몇 줄 잎들이

  내 의식의 지퍼를 열고서

  뭉텅뭉텅 빠져나오는 듯한 오후

  바람이 분다

  창은 이럴 때 늘 벽이 된다

 

  커피는 내가 새벽꿈들을

  다 몰아낸 뒤에나 끓을 것이다

  기다림이 왜 오랫동안 거실에서

  풍토병처럼 동거하는지

  커피를 끓이다 보면 알게 된다

 

  어제도 누군가의 태양이 서쪽으로 졌다

  오랜 병고 끝에 있는 아버지와

  며칠간 통화가 부재 신호로 바뀐

  고향 친구 부음으로 느닷없는 날에도

  서녘 하늘은 몽환처럼 붉다

 

  허공 한편에 위태롭게 매달렸던 이별의 언어들은

  쉽사리 밟히지 않을 거실 속을 헤맨다

 

  맞잡은 손을 놓아야 할

  이별의 영토를 넘겨다보는 일은

  얼마나 눈물겨운 아름다움인지

 

  나는 창 밖 풍경들이 나무에게 가려질 때마다

  바빠지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 스마트폰 숫자들과

  오후 잠을 줄이고

  컴퓨터와 블랙홀을 서핑하다가

  몇 개 스팸들과 싸우곤 다시 거실로 나온다

 

  내 의식의 떨켜를 간질이는 커피향은

  붉은 나무 모퉁이를 돌아서

  주소불명의 사연을 빈 잔에 풀어놓는다

      -전문(p. 8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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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년간 『미당문학』 2024-하반기(18)호 <신작소시집/ 신작시> 中

  * 김영미/ 충북 충주 출생, 2003년『문예사조』로 시 부문 등단, 시집『지렁이는 밟히면 마비된 과거를 잘라버린다』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