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빗/ 김건영
감나빗
김건영
처음으로 창밖에서 떨던 겨울나무를 알아차린 게 몇 살때였더라
아직도 그것들이 매일 밤 떨고 있다는 것을 안다
눈을 감으면 마음이 낫던 때가 있었는데
그림자는 아무것도 아니야
이제 눈을 감아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거라고
아름다워지려면 모르는 게 좋더라
지식이 밥 먹여 주나
고지식하단 말이나 듣지
너무 깊이 알면 착해질 수도 없어
알면 알수록 무서운 것들이 늘어나
눈을 감으면 좋은 점이 많아
이제 그림자도 정말 무섭다는 걸 알아
이제 눈을 감아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거라고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왜 나를 때려요
그러게 왜 가만히 있었어요
창밖에서 떨고 있는 겨울나무처럼
가만히 흔들렸겠지
눈을 감는 아이들이 있겠지
이제 눈을 감고
짙은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숫자를 거꾸로 세 봐
귀신이 되면 귀신이 무섭지 않아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면
혐오하는 것이 는다는 사실을 잊으면서
이제 눈을 또 감아
-전문-
해설> 한 문장: 글을 쓰는 많은 작가들이 겪는 문제일 것이다. 글을 쓰는 것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전업 작가로 활동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직업별 연봉 순위에서 시인도 소설가도 언제나 최하위에 위치한다. 글을 쓰면 쓸수록 작가는 가난해진다. 글을 계속 쓰려면 다른 직업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직장에서 퇴근을 하면 집으로 글을 쓰러 출근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언제나 직장의 일과 원고 마감에 쫓기는 삶은 피로하다. 글을 쓰면 쓸수록 작가들은 소외된다. 집으로부터, 안정적인 삶으로부터 멀어진다. 김건영 시인이 "시인"을 "부모님의 등골을 빨아 최선을 다해 가난해지는 사람"으로 정의하는 이유다(「빚이 사라지면 너에게 갈게」)
이러한 이유 떄문에 시인은 이 시의 제목을 「감나빗」으로 지었을 것이다. '감나빗'은 게임 'X-COM' 시리즈에서 나온 말이다. 총을 쏘았을 때 일정 확률로 총알이 빗나가며 '빗나감!'이라는 안내 문구가 뜨는데, 이것을 거꾸로 뒤집어 '감나빗'이라고 부른다. 빗나갈 확률이 0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플레이어 메시지를 한 번씩은 보게 되는데, 중요한 순간 공격이 빗나가는 일이 종종 있어서 플레이어들의 뒷목을 잡게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메시지다. 시를 쓰면 쓸수록 생존에서 멀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감나빗'의 상황과 꽤 잘 들어맞는다. 자신을 괴롭히는 실존적 문제들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려고 시를 쓰고 있는데, 그럴수록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들이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마치 그의 인생이 목표로부터 빗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어쩌면 빗나가고 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감나빗'이 '밈'으로 사용되고 있는 단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밈'은 패러디적 요소가 강하다. 문자 언어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세계에서, 밈은 언어유희의 일종으로서 다양한 변이와 패러디를 만들어 낸다. 중요한 것은 유머다. 사람들은 절망적이고 암담한 상황도 밈을 통해 희화화하고 극복할 힘을 얻는다. 김건영 시인은 자신의 인생이 빗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감나빗'이라는 밈을 통해 절망감을 다른 것으로 반전시킨다.
시인은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면/ 혐오하는 것이 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그는 그것을 "잊으면서" "눈을 또 감"는다.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실존적 문제가 시스템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에 눈을 감는 것이 아니다. 시를 쓰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에 눈을 감는 것도 아니다. 그는 시인으로서 시를 쓸수록 소진되어 간다는 시실로부터 눈을 감는다. 시를 쓰기 위해 그는 자신을 흔들리게 하는 절망적인 상황을 외면한다. 시를 쓰고자 하는 욕망과 암담한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그는 시를 택한다. 이것이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선택이다. 그는 실존의 목적과 의미를 스스로 선택한다. 주체적 선택을 통해 김건영이란 존재는 시인이 된다. 이것이 그의 실존을 건 선택이다. 그 선택을 그는 기어코 '귀신'으로 거듭난다. (p. 시 54-55/ 론 143-145 ) <김동진/ 문학평론가>
* 블로그 註 : 위 해설 중 괄호 속에 언급한 시「빚이 사라지면 너에게 갈게」, 이 블로그에서 검색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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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널』에서/ 2024. 8. 10. <파란> 펴냄
* 김건영/ 2006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