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호_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전문)/ 국수 : 백석
국수
백석 (1912-1996, 84세)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싸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넢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햔 흰 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든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 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녯적 큰마니가
또 그 짚동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 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녯적 큰 아버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素朴한 것은 무엇인가
-전문, (고형진 편 『정본 백석 시집』, 문학동네, 2020)
◈ 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전문)_ 유성호/ 문학평론가
후각과 미각은 지금도 선명하게 어린 시절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고 있는 원초적 감각이다. 감칠맛과 쓴맛, 구구하고 아릿한 냄새들을 어찌 잊을 것인가. 아닌 게 아니라 지금도 문학작품 속에 후각이나 미각 충동을 돋을새김하는 장면이 나오면, 우리의 심장은 어느새 어린 시절 겪은 내음과 맛의 순간으로 퇴행할 수밖에 없다.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이러한 감각을 본격적으로 가장 멋지게 재현한 시인은 누가 뭐래도 백석(白石, 1912-1996, 84세)일 것이다. 그의 시편에는 맛이나 냄새와 관련한 아미지군郡이 수없이 등장한다. 여럿 취할 수 있겠지만, 그 가운데 단연 아름답고 섬세하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는 사례는 「국수」일 것이다.
그가 만주 신경(新京, 지금의 장춘)에 거주할 때 창작하여 고국으로 보낸 이 시편은 『문장』 1941년 4월호에 실렸다. 이 책은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가장 귀중한 지면이었던 『문장』의 폐간호이기도 했다. 여기에 백석은 「흰 바람벽이 있어」라는 자신의 대표작을 함께 실었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라는 절창을 들려준 이 시편은 지금도 우리 근대시의 정상으로 손색이 없다. 이 작품과 나란히 실린 「국수」는 이러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했던 시공간을 풍요로운 감각으로 재현함으로써 우리에게 가장 구체적인 감각의 정점을 선사한 것이다 시인은 우리가 오랫동안 누려온 기층의 습속이나 문화야말로 저 군국주의의 폭력에도 연면하게 이어져온 '우리다움'이었음을 은은하게 웅변했던 것이다. 작품을 한 번 읽어보자.묵독보다는 음독이 한결 더 어울리는 것이다.
지금 읽어도 실감이 넘치는 명편名篇이다. 물론 이 시편의 제목 '국수'는 요즘 말로 하면 '냉면'이다. 밀 대신에 메밀가루로 만드는 국수는 팡안도 지역에서 집집마다 갖춘 국수틀로 빚었다.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 국"을 넣고 "얼얼한 댕추가로(고춧가루)"와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넣어먹는 서북지역 특유의 먹거리였다. 남북정상회담 때마다 화제가 되곤 하는 '평양냉면'의 원조인 셈이다. 나는 평양냉면을 특별히 좋아한다. 여름이 되면 여기저기 등장하는 '물냉', '비냉', '회냉'을 모두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평양냉면의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맛이 제일이다. 굳이 말하자면 담백한 맛인데 백석은 그것을 '고담姑淡'과 '소박素朴'이라고 규정했다. 예전에는 꿩고기가 얹히곤 했지만 지금은 그냥 쇠고기를 쓴다. 배도 넣고 동치미 무를 썰어 넣기도 한다. 거기에 달걀 반쪽과 백김치를 함께 먹으면 우리가 즐기는 평양냉면이 된다. 『동국세시기』에도 냉면은 서북지역 것이 최고라고 적혀 있다는데, 해방 후 그쪽에서 월남한 분들에 의해 이 음식은 남쪽에 정착하게 되었다.
냉면 외에도 여름철 또 하나의 별미는 콩국수다. 여름 한복판을 지나가는 데 콩국수 만한 것이 없다. 차가운 콩국에 오이를 썰어 넣고 얼음을 몇 띄우면 냉면과 함께 어느새 여름철 대표 먹거리가 된다. 그러고 보니 국수에서 파생한 음식은 정말 많다. '콩국수' 외에도 떠오르는 대로 적으면 '칼국수', '밀국수', '메밀국수', '쌀국수', '잔치국수', 냉국수', 비빔국수'로 한없이 번져간다. 우리가 또 좋아하는 '라면'은 '납면拉麵'이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는데 북한에서는 '꼬부랑국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 하나만 소개해보자. 혹시 기차에서 잠시 내려 후루룩 먹고는 다시 기차를 타고 꽤 긴 거리를 가야 했던 시절의 '가락국수'를 아시는지 모르겠다. 특별히 대전역의 가락국수는 퍽 유명했는데 승강장 간이식당에서 팔았다. 물론 경부선과 호남선의 분기점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경부선과 장항선의 분기점인 천안역, 중앙선과 태백선과 충북선이 분기하던 제천역, 경부선과 대구선의 분기점인 대구역에서도 가락국수는 베스트 음식이었다. 여기서 '후루룩'이라는 표현을 생각해 보자. 먹는 게 아니라 마시는 수준의 그 의성어 안에는 여러 의미가 들어 있을 것이다. 맛이 좋으니 빨리 먹는다는 뜻도 있겠지만, 양이 적어 빨리 먹을 수밖에 없던 시절이 서려 있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차가 언제 떠날지 모르는 초조감이 그 속도감을 불러왔을 것이다.
이처럼 맛의 기억들은 너무도 선명하게 한 시절을 붙잡고 있다. 우리는 그 맛과 내음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어린 시절을 떠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장면과 순간을 지금도 여러 형태로 복원하고 재현해간다. 근대문학의 성년 주체들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는 방식이었다. 이래저래 국수가 먹고 싶은 날이다. 학교 앞에서 냉면을 먹든, 조금 비용을 더 들여 장충동 쪽 면옥으로 가서 고담과 소박의 평양냉면을 먹든, 여름철 별미인 콩국수를 먹든, 아니면 그 옛날의 가락국수를 상상 속으로 찾아가든 말이다. ▩ (p.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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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매거진 시마 SIMA』 2023-가울(17)호 <유성호의 문학톡톡>에서
* 유성호/ 1964년 경기 여주 출생, 1999년 ⟪서울신문⟫으로 평론 부문 등단, 저서 『서정의 건축술』『단정한 기억』『문학으로 읽는 조용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