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니체에게 묻는다/ 나정욱

검지 정숙자 2024. 8. 8. 01:37

 

    니체에게 묻는다

 

     나정욱

 

 

  가족이 뭐냐고

  형제가 뭐냐고 형제 중에 동생

  동생 중에 여동생이 뭐냐고

  사랑에 취약한 니체에게 묻는다

  연애가 뭐냐고

  철학도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랑이 뭐냐고

  사랑에 빠져 사랑에서 헤어나오는 것이 사랑이냐고

  사랑에 빠져 사랑에 익사하는 것이 사랑이냐고

  평생을 경계했던 동정에 빠져 익사한 니체에게 묻는다

  동정은 사랑이냐고

  동정은 사랑이 아니냐고

  사랑에 빠진 철학자 니체에게 묻는다

  사랑하여 미친 당신은 행복하냐고

  미친 당신이 그리운 밤 니체에게 묻는다

  당신이 사랑한 별은 그 밤의 어떤 별이었느냐고

     -전문-

 

  해설> 한 문장: 혼선을 빚게 하는 사랑의 개념은 "사랑에 빠진 철학자 니체"의 맹목적 사랑이 그가 "경계했던 동정에 빠"진 일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데에 연유한다. 사랑의 개념에 빠져 연구에 매진하는 사랑학의 주체가 니체이기에 그에게 이 학문은 맹목적일 수밖에 없다. 어느 결에 맹목적인 사람이 되어 사랑을 설파하는 이 철학자에게 사랑의 개념은 온갖 파토스와 뒤섞인 채 세분화가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사랑에 빠지면 사랑의 대상인 사랑이 보이지 않는 이치대로 분할이 불가능한 파토스가 사랑이다. 어느 일면은 과잉이고, 어느 일면은 결핍인지조차 알 길이 없는 이것을 하나의 기표 '사랑'으로 통합하는 사랑의 학문을 향하여 시인은 사랑의 범주를 물으면서 "동정"을 들먹인다. 그렇다면 동정은 사랑과 동류가 아니냐면서 두 관계항의 차이를 알고 싶어 한다. 형제와 여동생을 사랑하는 것이냐 동정하는 것이냐. 아니면 두 개의 개념이 착종된 상태를 사랑이라 믿으며 동정을 발휘하는 것이냐. 그것도 아니면 이 모든 것을 사랑으로 통합할 수 있느냐는 내심을 반영한다.

  이 같은 물음에 내재한 개념화의 불가능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항을 분간하고 싶어 하는 시인의 마음에서 우리가 읽는 것은 니체가 요청한 것처럼 "유일한 네 계명은 : 순수하라!"일지도 모른다. 형제를 사랑하라는 계명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사랑보다도 동정보다도 앞서는 '순수'를 바탕에 깔고 있을 때 가능하다고 니체는 부연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 순수의 정체에 무지하다는 데서 질문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 무념무상의 표백 상태 같은 것을 말하는지, 그렇다면 여기에 끼어들 법한 불순물이 무엇인지조차 가늠하지 못한다. 이 철학자의 권유대로 이제부터는 순수의 개념에 매인 사랑을 강화하는 일을 숙고해야 할 것인가. 그렇다면 방황이 필연인 사랑하기에서 그 실천의 가능성에서 '동정'이라는 덕목을 삭제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더욱 강화해야 할 것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증류수 같은 마음으로 형제와 여동생을 사랑해야 할 것인가. "연애"하는 심정으로 피붙이를 동정하는 마음을 사랑이라 할 수 있느냐는 질문까지 더하여 이토록 오리무중에다 경계 상실의 개념을 끝도 없이 질문해야만 한다. (p. 시 110/ 론 130-132) <김효숙/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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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얼룩진 유전자』에서/ 2024. 7. 27. <상상인> 펴냄

* 나정욱/ 1990년『한민족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며칠 전에 써 두었던 내 문장에서 힘을 얻는다』『눈물 너머에 시의 바다가 있다』『라푼젤 젤리점에서의 아내와의 대화』, <한국작가회의> <울산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