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시 숲 외 1편/ 김백겸

검지 정숙자 2024. 7. 11. 17:56

 

   

    시 숲 외 1편

 

    김백겸

 

 

  몽상 소년은 가죽나무와 오동나무가 있는 울타리에서 평상에 누워 구름을 보며 낮잠이 들던 어린 시절에도 시 나무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바람에 날리는 이파리들이 푸른 침묵을 뒤집어 보여주는 흰 배때기들이 웅얼거리는 아기의 입술 같다는 생각을 했을 뿐

 

  몽상 소년은 같은 울타리를 사용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정을 메운 플라타너스를 아침노을과 저녁노을 사이로 매일 창밖으로 쳐다보았다

  청소년기의 짙은 우울과 몽상은 이파리를 따라 피고 졌으나 시 나무가 플라타너스의 모습으로 안개 속에서 희미한 검은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음을 그때도 몰랐다

 

  몽상 청년의 심장으로 피가 몰리기 시작하고 가슴에 웅덩이로 패인 검은 상처가 시간을 빨아들였으며 현실로 향한 마라톤 경주의 출발선에 있었던 대학 말년에 시 나무는 갑자기 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나무는 가죽나무와 오동나무와 플라타너스였으며 동시에 샤먼들의 하늘 밧줄인 자작나무와 모세가 무릎을 끓어 야훼의 음성을 들었던 가시 떨기나무였다

 

  세상 나무들의 모든 뿌리가 어두운 지하에서 얽히고 나무의 잎맥마다 스며든 수액들이 연기를 피우고 있었다

  번개와 바람이 불 지르던 꿈과 환상은 이파리마다 웅얼거리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몽상 청년은 숲의 길보다는 세속 도시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입사 시험을 보러 다녔고 컴퓨터와 계산기로 거래를 관리하는 행정원이 되었다

 

  생과 죽음 사이에 경계를 친 붉은 담장 같은 황혼이 인생의 종착역이 가까웠음을 일깨워 주었을 때 시 나무는 갑자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파리를 가진 모든 나무들이 은빛 갈기를 빛내면서 나무는 나무 이상의 존재임을 몸으로 증명했다

  시 나무가 몽상 학인에게 사랑하는 눈길을 보낸 마지막 편지였으며 최후의 통첩이었다

 

  몽상 학인은 시의 숲으로 가기 위해 지금까지 걸어온 먼 길을 되돌아 가야 했다 

     -전문(p. 10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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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소나    갑옷

 

 

  장군이 입은 갑옷 한 벌을 나, 소원하였다

  적으로부터 나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든든한 빽이라 여겼으므로

 

  갑옷을 입으면 내 정신이 위엄을 갖추게 되고, 몸은 투명한 신비에 싸여 창과 칼도 운명을 피해가리라 꿈꾸었으므로

 

  갑옷을 갖기 위해 나, 학문과 지식을 단련하였다

  예술과 철학을 합금한 강철로 갑옷을 해 입으며, 훈장처럼 눈부신 갑옷에 사람들이 모두 감명을 받으리라 오해했으므로

 

  그 갑옷 속에서 환갑을 넘긴 내 몸이 비명을 지른다

  갑옷을 벗고 싶어도 벗지 못한다

  갑옷이 나를 대신해 사람들과 악수하고 저 홀로 인생을 살아가므로

  갑옷이 스스로 위엄을 갖추고 창과 칼도 운명을 피해 가는 영광을 꿈꾸고 있으므로

  갑옷이 나를 대신해 죽음까지 가는 십만 팔천 리 길을 걸어가므로

       -전문(p. 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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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선집 『커피와 사약』에서/ 2024. 6. 30. <심지> 펴냄

* 김백겸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기상예보」 당선으로 등단, 시집『비를 주제로 한 서정별곡』『가슴에 앉힌 산 하나』『북소리』『비밀방』『비밀 정원』『기호의 고고학』『거울아 거울아』『지질 시간』, 론집『시적 환상과 표현의 불꽃에 갇힌 시인들』『시를 읽는 천 개의 스펙트럼』『시의 시뮬라크르와 실재實在라는 광원』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