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커피와 사약/ 김백겸

검지 정숙자 2024. 7. 11. 17:41

 

    커피와 사약

 

    김백겸

 

 

  커피 중독이 세종시 나성동 어반 아뜨리움 상가들이 라스베가스 스트리트 물처럼 올라간 산책길의 마지막에 이르러

  커피 중독이 상가의 윈도우에 황혼이 비쳐 있는 투섬플레이스로 갈까 이디야로 갈까 망설이는 끝에 이르러

  커피 중독이 이디야 커피숖에서 아메리카노 한잔을 시키고 창가에 앉은 방황의 끝에 이르러

 

  커피숍 창밖에는 휙 바람이 불어 가로수 이파리가 '너 자신을 알라'는 아폴론 신전의 경구처럼 흔들리고 있는 끝에 이르러

  커피 중독이 대학 첫 미팅 때 너무 떨려 커피잔을 잡을 수가 없었다던 친구의 청춘과 노회한 시골 의사로 늙은 일생을 뜬금없이 대비하고 있는 생각의 끝에 이르러

 

  커피 중독이 둥근 알람 판에 불이 들어와 기다림의 보상을 받는 만족에 이르러

  스님도 커피콩을 프라이팬에 볶아 드는 시대  커피 중독이 집착과 달관의 사사무애事事無礙에 이르러  

  커피 중독이 커피에 반응한 심장의 부정맥이 두려운 순간에 이르러

 

   커피 중독이 그래도 커피를 포기할 수 없어 커피를 마시는 순간에 이르러

  커피 중독이 '커피를 사랑하다 죽은 시인'  카피copy와 에피소드의 백 년 저작권을 가족에게 유언하는 백일몽에 이르러

  커피 중독이 사약처럼 황홀한 소마soma  카페인이 지금 현재를 오르가즘으로 몰아가는 열반에 이르러

  커피 중독으로 온몸이 죽음처럼 조용해지는 순간에 이르러

       -전문-    

 

  자선 시론> 한 문장: 은유와 알레고리는 작가가 정교하게 고안한 메시지  사물과 사물 사이의 창의적 관계를 드러낸다. 은유와 알레고리는 철학과 예술 심지어 과학에서도 작가가 중요한 생각을 드러내고자 할 경우 포기할 수 없는 도구로 사용해 왔다. 은유와 알레고리는 기호  사건의 관계를 정의하기에 수학의 방정식에 비유할 수 있다. 수학자가 새로운 방정식을 고안해도 실제의 현실 운동으로 증명되지 못하면 무의미한 방정식이 된다. 마찬가지로 작가가 창안한 기호 공간  상상도 인류의 문화 환경  meme에 의해 수용되거나 재사용되지 않으면 공허한 문장이 된다.

        *

  모범으로 삼았던 시인들의 시가 더 이상 모범이 아니었을 때, 과거에 잘 썼다고 생각한 습작 시들이 수준이 안 된 시였음을 알았을 때, 시 공부는 진척이 된 증거일까? 20-30대에는 시단에 먼저 진출한 동년배 시인들의 화려한 수사들이 부럽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감정이 없다. 독자가 많든 적든 본인 스타일의 시가 확립되고 나서다. 경탄할 수 있는 시가 사라진 것은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 (p. 시 176-177/ 론 199 · 201-202) <저자/ 시인>

 -----------------
* 시선집 『커피와 사약』에서/ 2024. 6. 30. <심지> 펴냄

* 김백겸/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기상예보」 당선으로 등단, 시집『비를 주제로 한 서정별곡』『가슴에 앉힌 산 하나』『북소리』『비밀방』『비밀 정원』『기호의 고고학』『거울아 거울아』『지질 시간』, 론집『시적 환상과 표현의 불꽃에 갇힌 시인들』『시를 읽는 천 개의 스펙트럼』『시의 시뮬라크르와 실재實在라는 광원』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