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시

한성례_전통 서정을 구축한 디아스포라의 재일시인/ 무사시노 : 안준휘

검지 정숙자 2024. 7. 11. 03:03

<외국시>

 

    무사시노武蔵野

 

    안준휘安俊暉 / 한성례

 

 

  무사시노에

  뽕나무 오디열매가 익어갈 무렵

  그대와 

  만났네

 

  무사시노의

  졸참나무 단풍

  잎 하나는

  그대와 나의

  정표

 

  자욱한 비안개

  속

  인생의 시간

  쉬지 않고

  지나가네

 

  내가

  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을 때

  무사시노에 있었네

 

  그 무렵

  직박구리만

  울고 있었네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신에게 갚는 것

  나 자신의

  죄를 갚는 것

  무의 사랑에

  눈 떠

  가는 것

 

  그대

  나를

  이국적이라

  하네

  내 안에

  아버지 살아 계시고

  어머니 불 밝히시네

  내 고향

  부모님 고향

  갈댓잎

  바람개비 돌고 있네

 

  내 고향

  산철쭉

  보니

  아버지 고향

  경주의

  산철쭉 생각나네

 

  지금 내 무덤 위

  솔바람 울고

  멧새 지저귀고

  그늘 속 잡초에

  도라지꽃

  흔들리네

  한 방울 눈물뿐인

  덧없는 삶

 

  혼잡 속

  인생의

  달달한 술과

  떫은 술을

  섞어 마시네

 

  고향의 갈댓잎

  마구 흔들리네

  나

  그대를 만난 후

  마구 흔들리듯이

 

  뗏목 살결

  하얗고

  미끈하게

  앙상하게

  바다바람에

  쉬고 있네

 

  내

  발밑의

  돌은

  풍화되어

  시간을

  새기고 있네

 

  구근에서

  싹 나오니

  때까치 우네

 

  여주덩굴

  노란 꽃

  감추어 둔

  초록

  꺼내네

 

  눈발

  고요해지고

  낮게

  날아가는

  새의 그림자

 

  사람은

  미치네

  사람은

  깨닫네

 

  신은

  그대를 통하여

  다시

  모든 것을

  보여주려 하네

 

  죽음이여

  피하지 못하네

  내 삶을 따라 오는

  캄캄한 어둠

  빛이 존재할 때

  내 생을 품고

  영원한 존재로

  데려가 다오

 

  봄의 거센 바람

  소리 심하네

  내 회한의

  소리와도 같네

 

  초봄의

  따스한 빛 있어도

  차가운 바람

  무사시노 나무의 높은 우듬지

  의외로 날카로운 딱따구리 소리

  그 모습 찾아 올려다보니

  역시 초봄의 푸른 하늘

  속절없이 빠른 구름

  흘러가네

 

  과거는 이미 없고

  지금 여기 있는 것도

  순식간에 과거가 되네

  나의 삶은 어디인가

  이미 끝난 것인가

 

  인생의

  슬픈

  주마등

  지금 밝혀지는 것은

  죄와 무력함

  인생의 기로

  얻는 것과

  잃는 것

  골짜기

  흘러 가네

 

  언제나

  멈춰 서는 강가

  물 없는 바닥

  내 그림자

  찍혀 있네

 

  모든 것에

  슬퍼하는 목소리

  들리네

  하지만

  또 들어보니

  모든 것에

  기뻐하는 목소리

  들리네

  신은 나에게

  모든 것을

  주셨네

  슬픔과

  기쁨의 목소리를

 

  나의 성립과 존속 여하를

  아는 것은

  신을 아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네

 

  그대 있어 내가 있는 불가사의

  그대가 있어 소우주를 이루네

 

  때죽나무 꽃

  오월 바람에 분분히

  흩날려 내려앉는

  무사시노의 나무 그늘

  나 걸어가는 길

  산비둘기 한 마리

  조용히 나를 이끌어가네

 

  광활한 대지

  제단에

  제사드리는 나

  무사시노에 피어오르는

  모시풀 들판의 연기

  멀리멀리

  뻗어가네

 

  내 조선

  내 안의

  주마등

  지금 다시

  모시풀 들판

  멀리

  가까이

  내 안에

  돌고 돌며

  사네

 

  오늘밤 무사시노의 보름달

  구름 한 점 없네

  내려서니

  등뼈인 조선

  다시 불 켜지며

  무사시노 모시풀 들판이 되네

    -전문(p. 194-202)

 

  

  ▶무사시노武蔵野 들판에서 고대 한반도 도래인의 언어로 사랑과 밤을 노래하다(부분)_ 한성례/ 시인

  안준휘 시인은 재일 2세대다. 그는 일본에서 나고 자랐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그는 이바라키현茨城県 산촌에서 자랐다. 중학교 때 우연히 구니키다 돗포(国木田独步, 1871-1908, 37세. 일본의 소설가, 시인, 저널리스트, 편집자)『무사시노 武蔵野』라는 수필집을 읽고 깊이 감동한다. 이것은 그가 문학에 눈을 뜨는 계기였다. 그는 당시 무사시노가 어느 지역의 지명인지 알지 못했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나중에 대학생이던 어느 날, 무사시노 지역이 한반도 도래인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사시노의 어원은 서기 600년대에 한반도 도래인들이 직물 기술과 함께 가져온 마의 일종인 모시풀 종자의 들판苧種子野이라는 의미였다. 그것을 알게 된 그는 형용할 수 없는 뜨거움이 가슴속에서 끓어오른다. 그 수필집을 들고 무사시노의 무사시 사카이 역에 내려서니 그때까지 본 적 없는 붉은 색을 띤 커다란 보름달이 두둥실 떠 있었다고 한다. 그 광경은 '무사시노 모시풀 들판'이 되는 순간이었다. 환상 같기도 하고 몽상 같기도 한 그의 무사시노와의 만남이다. 그는 1,400년의 아득한 시공을 넘어 보이지 않는 강한 힘에 이끌려 현대와 무사시노가 맺어지는 신비감을 맛본다./ 이후로 무사시노는 그의 시 세계를 장악한다. (p. 시 194-202/ 론 191-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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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층』 2024-여름(102)호 <해외시단 산책_재일시인 안준휘安俊暉> 에서

 * 안준휘安俊暉/ 1943년 이바라기현茨城県 출생, 본적은 경상북도, 재일교포 2세, 조치上智 대학 철학과 및 조치대학 철학과 대학원 졸업, 일본어 시집『모시풀 들판苧種子野』,『오디열매』『무사시노』『등심초』 등, 영어 시집『MUSASHINO』(영일중역시집), 한국어 시집『무사시노武蔵野』『등심초灯心草』(한일중역시집, 근간)이 있다

 * 한성례/ 세종대학교 일문과와 동 대학 정책과학대학원 국제지역학과 일본학 석사 졸업, 1986년 『시와의식』으로 등단, 한국어시집 『실험실의 미인』 『웃는 꽃』, 일본어 시집 『감색치마폭의 하늘은』 『빛의 드라마』, 인문서 『일본의 고대 국가 형성과 만요슈萬葉集』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