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김태경_인권운동의 발상지 진주와 타자 연대성(발췌)/ 수박 : 허수경

검지 정숙자 2024. 7. 10. 17:36

 

    수박

 

    허수경(1964-2018, 54세)

 

 

  아직도 둥근 것을 보면 아파요

  둥근 적이 없었던 청춘이 문득 돌아오다 길 잃은 것처럼

 

  그러나 아휴 둥글기도 해라 

  저 푸른 지구만 한 땅의 열매

 

  저물어가는 저녁이었어요

  수박 한 통 사들고 돌아오는

  그대도 내 눈동자,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었지요

 

  태양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영원한 사랑

  태양의 산만한 친구 구름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울적한 사랑

  태양의 우울한 그림자 비에게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혼자 떠난 피리 같은 사랑

 

  땅을 안았지요

  둥근 바람의 어깨가 가만히 왔지요

  나, 수박 속에 든

  저 수많은 별들을 모르던 시절

  나는 당신의 그림자만이 좋았어요

 

  저 푸른 시절의 손바닥이 저렇게 붉어서

  검은 눈물 같은 사랑을 안고 있는 줄 알게 되어

  이제는 당신의 저만치 가 있는 마음도 좋아요

 

  내가 어떻게 보았을까요, 기적처럼 이제 곧

 

  푸르게 차오르는 냇물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재와 붕장어의 시간이 온다는 걸

  선잠과 어린 새벽의 손이 포플러처럼 흔들리는 시간이 온다는 걸 

  날아가는 어린 새가 수박빛 향기를 물고 가는 시간이 온다는 걸

    -전문,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38-39쪽

 

   * 이 글은 「허수경 시에 나타난 타자 읽기 양상과 연대성」( 국제어문』 100, 국제어문학회, 2024) 논문을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힌다.

 

  ▶인권운동의 발상지 진주와 타자 연대성*(발췌)_김태경/ 문학평론가 · 시인

  허수경(1964-2018, 54세)은 경상남도 진주에서 출생하여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87년 『실천문학』 복간호에 「볕」 외 4편을 발표하여 시인으로 데뷔하였다. 등단 1년 후인 1988년에 첫 시집인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1)를 상재하고, 1992년에 두 번째 시집 『혼자 가는 먼 집』2)을 발간하였다. 그녀는 두 번째 시집을 출간한 1992년에 독일로 이주하여 마르부르크대학에서 선사고고학을 전공하고, 뮌스터대학에서 고대동방문헌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그리고 독일인 지도교수와 혼인하여 독일에 정착하는 동안, 문학 작품집필과 고고학자로서의 활동을 함께 하게 된다.

   1) 허수경,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실천문학사, 1988.

   2)        ,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사, 1992.

 

     *

 위 시(「수박」)에서 화자는 "아직도 둥근 것을 보면 아"프다고 말한다. 그것은 마치 "둥근 적이 없었던 청춘"이 "길 잃은 것"과 같은 아픔이었다. 이 표현을 통해 '둥글다'가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의미는 '수박'을 활용하여 선명하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수박 한 통 사들고 돌아오는/ 그대"는 "내 눈동자",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다. 그리고 "당신은 영원한 사랑"이라고 "태양을 향해 말을 걸었"다. 그러나 화자는 '태양'뿐만 아니라 '태양의 산만한 친구'인 '구름'에게도 말을 걸고 구름에게 "당신은 나의 울적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또 '태양의 우울한 그림자 비'에게는 "당신은 나의 혼자 떠난 피리 같은 사랑"이라고 언급한다. 작품에서 화자는 '태양'이라는 중심 사물만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구름'과 '비'라는 주변 소재에도 '사랑'을 붙이며 이 소재들을 모두 '사랑'이라는 범위에 포함시킨다. 이로써 중심의 경계를 지우는 것이다. (p. 시 176-177/ 론 171 ·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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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층』 2024-여름(102)호 <지역성과 새로운 시대정신 ①> 에서

 * 김태경/ 2014년 『열린시학』으로 평론 부문 등단,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평론집『숲과 기억』, 시집『액체 괴물의 탄생』, <객>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