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고형진_세상에서 가장 슬픈 속삭임(발췌)/ 속삭임 1 : 오탁번

검지 정숙자 2024. 6. 29. 02:34

 

    속삭임 1

 

    오탁번(1943-2023, 80세)

 

 

  2022년 세밑부터 속이 더부룩하고

  옆구리가 아프고

  명치가 조여온다

  소리를 보듯

  한 달 내내 한잔도 못 마시고

  그냥 물끄러미 술병을 바라본다

  무슨 탈이 나기는 되게 났나 보다

  부랴사랴

  제천 성지병원 내과에서

  위 내시경과 가슴 CT를 찍고

  진료를 받았는데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진다

  (참신한 비유는 엿 사 먹었다)

 

  췌장, 담낭, 신장, 폐, 십이지장에

  혹 같은 게 보인단다

  아아, 나는 삽시간에

  이 세상 암적 존재가 되는가 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1초쯤 지났을까

  나는 마음이 외려 평온해진다

  갈 길이 얼마 남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가는 것보다야

  개울 건너 고개 하나 넘으면

  바로 조기, 조기가 딱 끝이라니!

  됐다! 됐어!

 

  2023. 01. 05.

     -전문-

 

  ▶세상에서 가장 슬픈 속삭임(발췌)_고형진/ 문학평론가

  오탁번 시인의 일주기인 2024년 2월 14일에 맞춰 간행된 유고시집 『속삭임』은 그의 열두 번째 시집이다. 그는 두 해 전인 2022년 4월 열한 번째 시집 『비백』을 간행한 바 있다. 그 직후부터 2023년 2월 14일 작고하기까지 십 개월가량 쓴 시들을 모아 간행한 시집이 『속삭임』이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이 시집을 직접 엮었다. 작품 배치와 시집 제목도 손수 작성해 놓았다. 따라서 이 시집은 생전의 그의 시집 발간 목록에 넣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는 사전에 자신의 문학적 생애를 스스로 완벽하게 정리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

  시의 첫 대목에 언급한 대로 시인은 2022년 세밑부터 몸이 안 좋았고, 증상이 지속되자 거처인 제천의 한 병원에서 검사받았는데, 암일 것이라는 청천벽력의 말을 듣는다. 유족의 전언에 의하면 시인이 검사받은 날짜는 2022년 12월 말이고, 검사 결과를 안 것은 2023년 1월 3일이었다. 인용 시의 말미에 '2023. 01. 05'라고 적혀 있으니까 시인은 그로부터 이틀 후에 이 시를 쓴 것이다. 몸의 여러 장기에서 암이 발견되었다는 끔찍한 검사 결과를 통지받고, 이틀 만에 이렇게 집중력을 발휘하여 시를 쓴다는 건 놀라운 일인데, 더 놀라운 건 이 시에 나타난 시적 태도이다. 그는 자신의 병세를 그대로 옮긴 다음, 자신의 처지를 "이 세상 암적 존재가 되는가 보다"로 적고 있다. 끔찍한 자기 병세를 이렇게 유머로 표현하는 건 극한의 절제력과 고도의 정신력을 지닌 자만이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는 이어서 자시 삶의 끝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으니 괜찮은 일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발생하는 방어 기제의 일환인데, 그는 단순히 자기 위안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시 쓰기로 실천하였다. 그는 이때부터 병상 일기를 시로 써나갔고, 동시에 『비백』 이후 발표한 시들을 모아 유고 시집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날 그는 두 편의 시를 더 썼다. 그는 자기 생의 끝 지점을 확인하고 얼마 안 남은 그날까지 치열한 시인으로 살기를 각오하고, 그 첫날 세 편의 시를 몰아 쓴 것이다.

 

      *

  그는 이 병상일지에 '속삭임'이란 제목을 붙였고, 이 말을 시집 제목으로 삼았다. 시인이 병중에서 이승의 마지막에서 한 시적 발언이 '속삭임'인 것이다. '속삭임'이란 조그맣게, 그리고 다정하게 할하는 것이다. 또 '속삭임'은 친근한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다. 인용 시의 2연은 실제로 여러 지인에게 보낸 문자이다. 그는 자신의 절망적인 병세를 지인들에게 낮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리고 이제 그 문자를 시로 옮겨 적고 시집으로 간행하여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속삭였다. 그는 병든 자신의 민모습을 그대로 내보이고 세상 사람들에게 다정하고 친근하게 다가서면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그는 정말로 시를 사랑하고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사랑했던 시인 중의 시인이었다. (p. 시 213/ 론 218 · 222 ·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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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네르바』 2024-여름(94)호 <poetic focus/ 유고시/ 작품론> 에서 

  * 오탁번/ 1943년 충북 제천 출생, 1967년⟪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아침의 예언』『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생각나지 않는 꿈』『겨울강』『1미터의 사랑』『벙어리장갑』『오탁번시전집』『손님』『우리 동네』『시집 보내다』『알요강』『비백』. 유고시집으로 『속삭임 등』,수상< 한국문학 작가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한국시협상> <고산문학상> <김삿갓문학상> <목월문학상> <공초문학상> <유심문학상 특별상>수상, <은관문화훈장(2010)>수훈, 한국시인협회 평의원, 고려대 명예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 고형진/ 1988년『현대시학』에서 문학평론으로 등단,  저서『시인의 샘』『백석시의 물명고: 백석시어 문류사전『박용래평전』『안암동 블루스』『내가 읽은 가난한 아름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