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유성호_일찍 개화한 현대성의 시조시인 박재두(부분)/ 꽃은 지고 : 박재두

검지 정숙자 2024. 5. 17. 02:34

<시조>

   

    꽃은 지고

 

     박재두(1936-2004, 68세)

 

 

  아홉 겹 성곽을 열고 열두 대문 빗장을 따고

  바람같이 질러온 맨 마지막 섬돌 앞

  뼈끝을 저미는 바람, 추워라, 봄도 추워라

 

  용마루 기왓골을 타고 내리던 호령 소리

  대들보 쩌렁쩌렁 흔들던 기침 소리

  한 왕조 저문 산그늘 무릎까지 묻힌다.

 

  다시, 눈을 닦고 보아라. 보이는가

  칼 놀음. 번개 치던 칼 놀음에 흩어진 깃발

  발길에 와서 걸리는 어지러운 뻐꾸기 울음.

      -전문(1981년)

 

  일찍 개화한 현대성의 시조시인 박재두/ 사량도의 시인(부분)_유성호/ 문학평론가    

  전남 통영의 사량도 능양마을에는 「별이 있어서」라는 작품이 새겨진 박재두 시비가 서 있다. 뱀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의 사량도蛇梁島는 한려해상국립공원 중간쯤에 위치해 있는 아름다운 섬으로서 박재두 시인의 고향이다. 운초云初 박재두(朴在斗, 1936-2004, 68세)가 남겨 놓은 시조를 생각할 때 이 섬의 역사와 풍광은 우리에게 정형미학의 한 정화精華를 선사해 준 천혜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지난 오월 잠시 들러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박재두 시인의 시조 미학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다. 오월 햇살과 바다의 율동이 어울려 남녘은 그야말로 봄날의 미학적 정점을 이루고 있었다.

  박재두는 196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목련』이 당선한 이래 한국 현대시조의 다양한 내용과 형식을 최대치의 적공으로 보여준 시인이다, 박재두는 그러한 세계를 현대시조의 한 봉우리였던 『율』 동인 참여와 『유운연화문』(1975)『쑥뿌리 사설』(2004) 등 두 권의 시조집 간행 과정을 통해 보여주었다. 김선태는 그 세계를 일러 "형식에 있어서 다양한 변주와 섬세한 묘사력, 내용에 있어서 자기 관조와 안빈낙도 그리고 자연 친화와 역사의식으로 집약"되었고 "모국어의 아름다운 조탁과 전통적 가락의 현대적 변용"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진즉 내린 바 있다.

  듣기로는 그가 결벽증을 가졌을 정도로 수정과 교정을 거듭하며 시조의 예술적 완성을 지향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시조를 현대적 양식으로 거듭나게 하는 방안으로 실험적 방법을 추구해 왔기 때문에 완성도 높은 시집 상재에 덜 열의를 가졌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태도와 감각 때문에 많은 연구자들은 박재두의 형식 실험 정신에 크게 주목하였고 높은 평가를 아끼지 않았다. 이후 1997년 뇌졸중으로 투병생활에 들어갈 때까지 그는 200편 넘는 작품을 발표하였고 2004년에 68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그리고 연전에 따님인 박진임 교수『박재두 시전집』(2018)을 묶어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박재두 시조의 서지적 집성이 온전하게 이루어졌다. 이 글의 인용 시편은 모두 이 책에 의거한다. (p. 시 129/ 론12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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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작』 2022-가을(81)호 <연재/ 크리티카  포에티카>에서  

 * 유성호/ 1999년 ⟪서울신문⟫으로 평론 부문 등단, 저서『서정의 건축술』『단정한 기억』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