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세유전의 문화적 밈 혹은 '가을 문명'의 한 소식(부분)/ 정효구
격세유전의 문화적 밈 혹은 '가을 문명'의 한 소식(부분)
정효구/ 문학평론가 · 충북대 교수
(···前略···)
2. '현대 향가'로 몸을 바꾼 '진화사'의 한 사건
호모 사피엔스인 현생인류에게 진화는 생물학적 차원과 더불어 문화적 차원에서도 이루어진다. 영국의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에 의하여 널리 알려지고 놀라움이 섞인 공감 속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된 '주체'로서의 유전자의 꿈과 욕망과 권력에 대한 설명은 인간들이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 온 자아의식과 주체의식을 무색하게 만든 획기적인 이론이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도킨스의 유전자 주체 이론은 인간의 자아의식이야말로 인연법에 의하여 가설된 '의식'의 형태에 불과할 뿐 '자아'란 본래 없는 것이라는 불교적 세계관과 인간관의 한 자락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관점에 기대어서 볼 때 호모 사피엔스인 우리들은 저도 모르는 유전자의 기획과 욕동에 의하여 다양한 활동상을 지금, 여기에서 연출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생물학적 차원뿐만 아니라 문화적 차원에서까지도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유전자의 거대한 기획과 욕동 가운데는 일반적인 유전과 조금 구별되는 이른바 '격세유전隔世遺傳'이라는 것이 있다. 격세유전이란 말 그대로 세대를 건너뛰어 유전이 이루어지는 일이다. 잊혀졌다고, 사라졌다고 생각되는 과거의 유전자가 강력한 힘을 갖고 시간적 격차 속에서 불현듯 출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격세유전은 유전자의 생존에 유익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다들 아시겠지만 문화적 차원의 유전자를 특별히 '문화적 밈'이라고 부른다. 인간만이 특별하게 창조하고 융성시키는 문화의 어마어마한 장 속에서 이 문화적 밈은 활발하게 활동한다. 공시적·통시적 경계와 다양한 여러 영역 간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이는 생물학적 유전자보다 더 가벼운 몸으로 자유분방하게 이주하고 전달하며 소통한다. 통상적으로 생물학적 유전자의 유전 활동이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지식 가운데 하나가 되었지만 문화적 밈의 활동상은 그에 비하여 다소 낯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깊게 보면 문화도 실은 생명체로서 인간의 생명적 현장이자 현상이다. 따라서 이런 견해를 갖고 보면 문화적 밈의 유전적 활동 역시 인간 생명체가 만들어 가는 길고 절실하며 절박하기까지 한 유전적 생존사生存史의 한 양태일 뿐이다. 어쨌든 문화적 밈의 유전적 활동에 대한 설명은 호모 사피엔스가 이 지구별에서 살아가며 창조하는 문화의 화려한 장과 그 현상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 그리고 향가시회에서 신라국의 향가를 지금, 이곳으로 불러내어 '현대향가'로 계승하고 재현하는 일의 속사정을 깊이 이해하게 한다. 아니, 신라국의 향가가 세월을 뛰어넘어 미래의 어느 지점에서 '부활'하는 중생重生의 현실을 이해하게 한다.
격세유전! 그것은 향가시회가 신라국의 향가를 불러내고, 신라국의 향가가 미래의 어느 시점에 불시착하듯 착지하는 일을 설명해 주는 원리로서 매우 적절한 개념이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호모 사피엔스가 생물학적 유전성보다 더 큰 범위와 비중을 두고 왕성하게 경작해 나아가면서 인간 생명체의 세계를 확대하고 강화시키는 것이 문화의 세계라고 할 때 문화적 격세유전의 원리와 현상은 더 큰 관심을 갖고 주목해 볼 만한 대상이다.
그동안 향가시회에서 발간한 총 6권의 '현대향가'는 각 호마다 특별한 제목을 달고 있다. 제1집은 『노래 중의 노래』를, 제2집은 『가사 중의 가사』를, 제3집은 『시가 중의 시가』를, 제4집은 『송가 중의 송가』를, 제5집은 『가요 중의 가요』를, 그리고 제6집은 『고대의 노래 현대의 노래』를 각각 그 제목으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은 제목이 가리키는 바를 읽어 보면 향가시회는 신라국의 향가가 지닌 문화적, 예술적, 문학적 수준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말하자면 그들은 신라국의 향가를 최고의 유전자 형질이 깃들고 발현한 문화, 예술, 문학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향가시회의 견해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은 동의를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향가시회에서 신라국의 향가를 그렇게 평가하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과거의 향가를 지금, 이곳에 불러내어 그들과 한 몸이 되고 싶은 강한 그리움과 사랑, 사모와 열망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향가시회의 이러한 마음자리는 과거의 향가를 이 시대에 무난하게 안착시키는 인因으로서의 토양이자 연緣으로서의 컨텍스트이다.
격세유전은 선형적인 유전적 지형도를 좀 더 역동적이며 복합적인 지형도로 전변시켜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요인일 수 있다. 특히 문화생태계는 이 격세유전하는 문화적 밈의 예측 불가능한 활동과 활약상으로 인하여 그 진폭을 넓히고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창조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지금, 이곳에서 호모 사피엔스라는 인간종은 물론 대한민국의 우리들의 살림살이는 생물학이 문화를 지배하기보다 문화가 생물학을 주도하고 지배한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이른바 문화가 융성해지고 그 위력이 대단한 시대 속에 있다. 현실이 이러하기에 격세유전하는 문화적 밈의 출현은 문화의 영역 곳곳에서 더 빈번하고 신선하게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해 본다. 문화는 자유로운 영혼의 일이고 인간적 상상력은 무한성을 가리키는바, 문화적 밈의 이동과 소통은 그것을 반영할 터이기 때문이다.
신라국의 향가가 지금, 이곳에서 환대를 받고 중생을 하는 것, 그것은 바로 문화적 밈이 격세유전하는 현실의 한 양태를 사건적으로 보여 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p. 143-147)
(···後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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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가시회_현대향가 제6집『고대의 노래 현대의 노래』 <해설> 에서/ 2023. 12. 20. <문예바다>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