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상희구/ 오탁번

검지 정숙자 2024. 2. 20. 01:10

 

    상희구

 

    오탁번(1943-2023, 80세)

 

 

  궁핍과 절망뿐이던 1950년대 그 시절

  대구 영남중학교 3학년 소년 하나이

  학교를 더는 다니지 못하고

  제적을 당하였다

  신문팔이도 하고 행상도 하다가

  대구소방서 사환으로 용히 들어갔다

  똘똘한 소년이 꾀부리지 않고 일을 잘 하니

  소방서 대원들 눈에 들어서

  밥도 거르지 않고

  틈틈이 공부도 할 수 있었다

  소년은 중학교를 꼭 마칠 생각에

  가까운 성광중학교를 찾아갔다

 

  소년은 힘차게 말했다

    3학년으로 꼭 넣어 주세요

  소년의 말을 들은 콧수염 교장이 말했다

    어디서 굴러온 놈이 생떼를 쓰냐

  제적을 당한 놈이 택도 없다

    1학년을 다시 다니거라

  일언지하에 퇴짜를 맞은 소년은

  울면서 소방서로 돌아왔다

  소년의 울음소리에

  소방서는

  빅뱅 0.001초 전의 우주처럼

  캄캄한 적막에 휩싸였다

 

  소년의 말을 다 들은

  소방서 부서장 오달용 소방감이

  정모를 쓰고 장갑을 끼더니

  대뜸 불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야 이 문디야, 퍼뜩 타라

  불자동차는 소년을 태우고

  성광중학교로 달렸다

  빛의 속도는 아니지만

  가히 불의 속도로!

    문디야, 사이렌 켜라

  소년은 스위치를 홱 돌렸다

  왱! 왱! 왱! 왱! 왱! 왱!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수업 중이던 중학교는

  삽시간에 난리가 났다

   왱! 왱! 왱! 왱! 왱! 왱!

  교장과 교사들이 뛰쳐나왔다

  불자동차는 운동장을 돌고 또 돌았다

  소방감이 교장에게 소리쳤다

    이놈아를 3학년으로 받아줄 때까지 돌겠소

  교장과 교사들은 말문이 막혔다

  불자동차는 운동장을 돌고 또 돌았다

  마침내 소년은 3학년으로 복학하였다

  소년은 밤새워 공부하여

  학년말에 1/55 통지표를 받았다

 

  세월이 흐르고

  소년은 쑥쑥 자랐다

  대구상고 야간부를 졸업하고는

  섬유업체를 세워서 큰돈도 만졌지만

  몇 년 후에 부도가 나서 그만 다 날렸다

  세상의 절벽 앞에 선 늙은 소년은

  그 순간 귀를 찢는 듯한

  불자동차 사이렌 소리가 들리자

  우뚝 일어섰다

  호구지책으로 조그만 인쇄소를 하면서

  밤에는 한국일보 문화강좌에 나가

  김광림 김윤성 정진규 시인에게

  난생처음 시를 배웠다

  소년은 마침내 시인이 되었다

  이 아니, 운명이 아닐쏘냐

    -전문, 『시와 세계』(2022,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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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탁번 유고시집 『속삭임』에서/ 2024. 2. 14. <서정시학> 펴냄 

  * 오탁번/ 1943년 충북 제천 출생, 백운초, 원주중·고, 고려대 영문과, 대학원 국문과 졸업.

  * 1966년⟪중앙일보⟫(동화) & 1967년⟪중앙일보⟫(시) & 1969년⟪대한일보⟫(소설) 신춘문예 당선, 시집『아침의 예언』『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생각나지 않는 꿈』『겨울 강』『1미터의 사랑』『벙어리장갑』『오탁번시전집』『손님』『우리 동네』『시집 보내다』『알요강』『비백』.

  * 한국문학작가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한국시협상, 고산문학상, 김삿갓문학상, 목월문학상, 공초문학상, 유심문학상 특별상 수상, 은관문화훈장(2010) 수훈. 

  * 한국시인협회 평의원, 고려대 명예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