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가오슝 식당의 친절한 여주인/ 최종만

검지 정숙자 2023. 12. 6. 02:47

<에세이 한 편>

 

    가오슝 식당의 친절한 여주인

 

     최종만

 

 

  불광산 불타 기념관을 둘러보고 가오슝 '보얼 예술특고'를 보러 가려고 택시를 불렀다. 일행이 5명이라 일반택시가 아닌 6인승 택시를 불러야 했다. 사실은 처음 이곳으로 여행 계획을 세울 때는 이곳에 가서 차량을 렌트해서 다니자고 했는데 우리나라와는 국교가 단절되어 렌트가 되지 않아 택시로 이동을 해야 했다. 금년(2019년)아내의 8순이라 아들 삼 형제와 함께 타이완의 남부 도시 가오슝(타이완 & 대만)을 여행 중이었다.

 

  중화민국 국민당 장개석은 중국을 대표하고 있었으나 공산당과의 다툼이 끊이지 않다가 공산당(모택동)에 밀려(1949년) 결국 타이완으로 옮겨갔다. 중화민국은 우리나라와 건국 때부터 국교를 유지해 왔으나 중국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1992년)를 맺으면서 국교를 단절하고 '타이완' 또는 '대만'으로 호칭하고 있다. 서울과 타이페이는 상호 대표부를 설치하고 영사업무를 비롯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그러나 정상적인 국교가 맺어지지 않아 이런 문제가 있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가오슝 보얼 예술특구高雄駁二藝術特區로 들어섰다. 가오슝항 2호 부두 일대의 부두창고는 모두 일제 강점기 때 건축된 건물들이었다. 오래된 옛 건축물을 개조해 설립한 특구에서는 각종 예술행사가 펼쳐지고 깃발이 걸려 있는 곳에서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고 거리는 활기가 넘치고 북적거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예술특구 거리에는 일본 영화 캐릭터의 공개 경연이 있는 날이었다. 거리에는 여자들이 중요한 곳을 5%만 가린 나신에 가벼운 가운을 걸치고 조금의 부끄럼도 없이 공개적으로 사진 촬영에 응하며 태연했다. 또 노랑머리에 털 가운을 두른 반라의 여인, 땅바닥에 질질 끌리는 치마를 입고 일본식 복장에 헤어스타일도 일본 스타일을 하고 즐거운 표정들이다. 일본식 복장에 니본도日本刀를 찬 남자아이들도 함께 거리를 종횡했다. 그들을 보고 있으려니 이 나라도 우리나라와 같이 일본의 침략을 받은 나라인데 우리와 너무나 다른 모습에 놀라움이 컸다. 이들은 왜 일본에 대해 거부감이 없을까.

 

  타이완은 16세기 이전까지 바다 건너에 있는 섬으로 중국 정부로부터 관심 밖에 있어 간섭이 없는 원주민의 나라였다. 그런데 16세기(1624년)에 네델란드가 처음 남쪽에 들어왔으며 얼마 후 스페인이 북쪽 타이페이에 들어왔다가 네델란드에 밀려 되돌아가고 네델란드가 지배했다. 그 후 중국 본토에서 청나라에 패망한 '명나라 장수 정성공(1944년)'이 건너와 타이완을 통치해 왔다. 후일 다시 청나라(1683년)가 이들을 평정하고 통치하다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이 지배해 왔다.

  타이완은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일제의 굴레에서 벗어났으나 1949년 장개석(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중국 공산당에 밀려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중화민국을 수립하고 '새로운 대륙 세력'이 대만을 통치하게 되었다.

  대만인의 98%가 한족이고 2%가 원주민이다. 그러나 그보다 명나라 '정성공'을 따라온 한족이 80%라 하는데 이들을 '내성인'이라 하고, '장개석'을 따라온 20%가 안 되는 한족을 '외성인'이라 한다.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는 인구가 적은데도 불구하고 많은 내성인과 원주민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강압 통치를 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내성인을 희생시켰다.

  타이완은 어차피 외지인들에게 지배를 받고 살았기 때문에 자기들에게 피해를 덜 준 사람들에게 호감을 보이는 것 같다. 주목할 점은 일본이 한반도에서는 민족말살정책을 비롯한 악랄한 정책을 집행했다. 물론 대만에서도 토착문화를 말살하려 앴으며 일본어를 강요했고 창씨 개명을 했다. 그러나 타이완은 신경을 덜 쓰고 간접 지배를 하여 자치적으로 살도록 버려두었다. 그들은 중국 본토인으로부터는 학대를 심히 받아 본토인에게 거부감이 크다. 그렇지만 일본은 철도를 가설하고 문화혜택도 주었다. 오히려 그들은 삶에 눈을 뜨게 했다고 믿고 있다. 그런저런 이유로 이곳 주민들은 일본에 50년간(1895~1945) 지배를 받았지만 호감을 갖고 있다. 

 

  예술특구 구경을 마치고 다이 제이 2부두역 곁으로 걸어서 갔다. 용인 경전철은 고가로 건설되어 있어 고가를 오르내리기에 불편함이 있고 거리에서 직접 잘 보이지 않지만 이곳에는 평지에 레일을 깔았으며 건널목이 설치되어 있고 바로 옆에서 열차와 그 안에 탄 승객들이 바라보였다. 우리도 이곳 다이 제이 2부두역(駁二大義)에서 크루즈 터미널(旅運中心)까지 경전철을 타보았다.

  아내가 랍스터를 먹고 싶다고 했다. 랍스터 식당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집에는 랍스터가 없었다. 그리하여 인터넷으로 찾아 다른 집으로 옮기겠다고 했다. 그 집 주인은 자기 집에서 나가겠다고 하는 우리에게 아무런 거부감 없이 친절히 택시를 불러주었다. 우리들은 밖에 나와 택시를 기다리며 오히려 그 집에서 나온 것이 미안했다. 그런데 그 여주인은 쫓아나와 택시가 오면 알려달라고까지 했다. 잠시 후 택시가 도착했다. 그 집 여주인 장사하기에 바쁜 중에도 내다보고는 쫓아 나와 택시 기사에게 찾아가는 집의 위치를 설명해 주며 잘 안내해 주라고 부탁하는 등 친절을 베풀었다. 더구나 우리는 외국인으로 언제 또 온다는 보장도 없는데 말이다.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그 여자의 연락처라도 알아 가지고 와서 편지라도 보낼 걸. 아무튼 그 식당 여주인의 친절이 마음 구석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런 사소한 친절이 나라의 이미지를 향상시켜준 애국이 아닐까 우리나라에도 그런 사람이 많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 (p. 118-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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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온문학』 2022-여름(32)호 <수필>에서

  * 최종만/ 강원 원주 출생, 2015년 『가온문학』 수필 부문 등단, 수필집『바다가 미운 여자』, <가온문학회> <아주문학회> 회원, <버드네노인복지관> 시니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