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황야(荒野)의 휴머니즘(Humanism)/ 황진섭

검지 정숙자 2023. 12. 5. 14:12

<에세이 한 편>

 

    황야荒野의 휴머니즘Humanism

 

    황진섭

 

 

  고구려인의 후예들이 한반도 북쪽 광대한 영역에 세운 나라가 발해다. 발해 옛 터전에 아무르강이 흐르고 있다. 필자가 연해주에서 바라본 아무르 강변 양안은 광대한 황무지다.

  하바롭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11시간 반, 시베리아 횡단철도 아케안호 편으로, 밤을 새워 달려가는 철도 연변에는 산이 보이지 않는 평원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스리스크까지 고속도로로 달려가는 112㎞,

그 벌판도 황야다. 헤이그 밀사단 수석대표였던 이상설李相卨 의사의 유허비에서 바라보는 벌판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땅은 기름져 보이고, 군데군데 물이 고여 늪이 되어있거나 정리되지 않은 하천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열차에서나 버스에서 황야의 수풀 속에 작은 마을들이 보였고, 마을 언저리에 듬성듬성 농경지가 보일 때마다 틀림없이 우리 동포, 고려인들이 개척한 땅이라는 확신이 솟아난다. 그렇다. 19세기 중후반, 기근과 기아에 쫓겨 함경도와 평안도 농민들이 이 땅을 찾아왔다. 20세기에 들어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고,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열혈熱血 망명객亡命客들이 찾아온 곳이 바로 이 황야다. 들판의 나무뿌리 풀뿌리를 캐내고 농경지를 일구었고, 피땀 흘려 옥토로 가꾸었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조치 이전에 이 연해주 땅은 우리 동포 고려인이 개척한 고려인의 땅이었다.

  

  넓은 땅이 부럽다. 방치되어 노는 땅이 아깝다. 8.15와 6.25 직후, 농촌에서 한 뼘 땅이라도 얻기 위해 괭이와 삽으로 산전을 개간하고 메밀 갈이를 했던 기억이 새롭다. 한국의 가난한 농민들에게 땅은 그렇게 소중한 것이었다.

  국내에는 날마다 매시간, TV를 통해 구걸이 계속되고 있다. 아프리카의 기근지역에서 어린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모습을 비춰주고 있다. 중동지역 전쟁난민들의 참상도 비추면서 동정심을 자극하고 있다. 국제 아동기금(UNICEF)과 국제 난민기구(UNRWA)의 이름을 빌어 자선을 명분 삼은 구걸의 대행이 아니고 무엇인가?

 

  강대국 지도자들이 왜 침묵하고 있는가? 연해주보다 더 넓은 황무지가 시베리아에도, 중국에도 미국과 캐나다에도 질펀하다. 거기에 아프리카 사람들과 전쟁난민들을 불러들이면 왜 안 되는가?

 

  올림픽경기를 할 때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마라톤에서 우승한다. 그만큼 인내심과 뚝심이 강하다는 하나의 사례다. 우리도 올림픽과 세계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하는 뚝심의 DNA가 민족혼을 타고 흐르고 있다. 그 뚝심으로 만주땅과 연해주를 개척했고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이라 믿는다. 아프리카나 중동 사람들도 헝그리 정신과 뚝심으로 고려인들처럼 열심히 사력을 다해 황무지를 개척하고 먹을 것과 살 터전을 이룰 수 있지 않겠는가?

 

  그때보다는 훨씬 손쉬울 것이다. 농기구가 기계화되었고 미국과 러시아에서 발견된 무한정의 석유로 필요한 만큼의 발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투자가 있어야 할 것이다. 선진 강대국들의 전쟁준비를 위한 군비 예산의 일부분이라도 이 휴머니티(Humanity)한, 대 사업에 투자하면 되는 것이다. 전쟁을 위한 투자는 학살과 파괴와 약탈을 위한 투자가 아닌가. 그러나 평원의 개척을 위한 투자는 생명과 건설과 복지와 평화를 위한 투자가 되는 것이다. 버려둔 황무지를 개척하는데 난민의 노동력을 투입하고 그 임금으로 난만의 생계비를 충당해 준다. 개척이 끝난 다음, 적정 임차료로 경작하게 하고 적절한 시기가 지난 다음 농경지를 분양, 열심히 일하여 얻는 농업 수익으로 지대를 상환토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기근과 전쟁난민의 문제는 동정과 구휼이 아니라 개척과 자립으로 유도할 수 있지 않을까를 생각해 본다. 국경을 그어놓고 그걸 지키겠다고 하는 것은 이기심이다. 이기심은 인간의 가장 저급한 감정이다. 지구는 전 지구인의 것이다. 지구인으로 하여금 지구의 황야를 개척하면 기아의 고통과 빈곤의 질곡桎梏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것을 위해, 강대국답게 평원의 대지大志를 펼쳐준다면, 그것이야말로 세계 평화와 인류의 복지를 실현하는 첩경이 아닐까?

 

  이번 연해주 탐방 여정에서 H중공업그룹이 영위하는 2.000만 평 크기의 H미하일로프 농장과, 미하일로프가 지역에 조성한 여의도의 23배나 되는 농장을 일정으로 잡지 못한 것이 아쉽다. 이 2개 농장에서 콩, 밀, 옥수수, 귀리 등 식량을 연간 16.000톤 생산하여 국내로 반입할 계획이라니 이는 국토확장에 다름 아니다. 강대국 국민과 지도자들의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지구인들이 기아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믿는다.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집단안보를 실현하는 것만이 강대국의 책무가 아니다.

 

  노벨평화상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 인류사의 위대한 개조자改造者가 되는 것이다. 작은 나라의 연로한 평화주의자는 연해주 대 평원에 서서 인류의 현재와 돌파구를 생각하고 미래의 희망을 꿈꿔본다.

 

  평원의 대 역사役事··· 그리고 황야의 그레이트 휴머니즘을···

  강대국 국민과 지도자들에게 호소한다. 세계평화와 인류 복지를 위해 인류사 개조의 대 로망(Roman)을 펼쳐주기를···. ▩ (p. 11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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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온문학』 2022-여름(32)호 <수필>에서

  * 황진섭黃晉燮/ 2007년『문학 21』로 수필 부문 등단, 번역가(일본어), 사회교육 전문 강사(역사· 안보· 문화· 웰다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