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시인의 이중생활/ 김세영
<에세이 한 편>
의사 시인의 이중생활
김세영
시인으로 등단한 2003년부터 나의 이중생활이 시작되었다. 명함에도 의사 김영철과 시인 김세영 두 개의 이름이 적혀있다. 낮에는 진료실에서 환자를 보고, 저녁에는 문학모임에 갈 때가 많다. 서가의 책도 시인이 되기 전에는 대부분 의학 서적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시인이 된 후에는 시집 등 문학 서적이 대부분 차지하게 되었다. 교우 관계도 동창이나 의사에서 시인으로 편중된 상태이다. 사람들은 의사이면서 시인까지 되었다고, 재주 많음을 부럽다고 말한다. 그러나 훌륭한 의사도 되지 못했고, 유명한 시인도 되지 못한 얼치기 낭만주의자나 몽상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인할 때가 많다.
나는 매일 아침 6시부터 7시 30분까지 양재천 둑길을 걷는 운동을 한다. 걸어가면서 시상이 떠오르면 휴대폰 메모란에 적어둔다. 출근 후 진료실에서 환자가 없을 때, 컴퓨터에 한글 프로그램을 띄어놓고 한 행씩 옮겨 적어가면서 수정해 나간다. 진료가 바쁘지 않을 때는 퇴근시에는 1차 초고 시가 한 편 완성된다. 퇴근 후 집에서는 조용히 시를 쓸 수 있는 여건이 안 되기 때문에 원고 제출 날짜가 임박한 경우에는, 밤에 진료실에 혼자 남아서, 최적의 시적 공간을 만들고 시적 정서 상태로 부양시킨 후 마무리 퇴고 작업을 하기도 한다. 집에는 세미나가 있다거나 병원자료를 정리한 것이 있어서 늦었다고 이야기한다.
나의 영부인(세영의 부인을 뜻하는 휴대폰 전화부 상의 호칭)은 내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어려운 시어만 나열하여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한다. 딸들이나 사위들도 선물한 시집에 대해선 한 마디도 말이 없다. 시를 읽어보지 않았거나 영부인과 같은 의견인 것 같다. 요즈음 일반 사람들이 시집을 잘 사서 읽지 않기 때문에 서점에서도 천덕꾸러기 신세인 시집을 낼 필요가 있느냐고 주장하는 아내와 노년에 가서 기념시집 한 권만 내기로 등단 초기에 약속한 바 있었다. 그러나 문단에서 시인 행세를 하려면 아무래도 시집 한 권은 있어야 되겠기에 2007년에 몰래 첫 시집을 출간하고 말았다. 영부인은 물론이고 딸과 사위 그리고 친지들에게도 숨기어 오다가 5개월 만에 들키고 말았다. 내시경 검사를 받을 친구를 소개시켜 주려고 병원에 함께 나온 아내에게 대기실 책꽂이에 있는 나의 시집이 발각되고 말았다. 설득과 호소로 면책을 받았다. 죄도 처음 지을 때가 어렵지 그 다음엔 쉬운 법인지 2012년에는 제2시집을 내었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대담하게 서명해서 영부인에게 선사했다. 보름쯤 지나서 내 시집에 대해 혹평하면서 나의 시인 자질 없음을 강변했다. 의사 시인이 되어 병원과 가정에 소홀한 것에 대한 견제구라고 내 나름 짐작해 본다. 시집을 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파기한 죄의 대로서는 괜찮은 편이었다.
내가 시의 매력에 빠지게 된 계기를 귀머거리로 열여덟의 짧은 생을 살다 간 동갑내기 고종사촌이 주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뛰어난 문인의 자질을 보여 주었기에 그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안타까운 그리움에 빠지게 된다. 고등학교에 입한한 후 입시 공부에서 해방되고, 시간적 여유도 갖게 되면서 그와 자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쓴 시를 몇 편 나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의 시적 감수성과 표현력에 깜짝 놀랐다. 고등학교 입시 준비에 바쁜 나와의 교우가 뜸하였던 이년 간 나름대로 문학 공부를 한 모양이었다. 나 또한 사춘기적 감성의 눈을 뜨기 시작한 시기라서 여기에 자극을 받아, 시집과 소설 등의 문학서적을 읽고 습작을 해보게 되었다. 그래서 대학 진학도 문과대학에 가려고 3학년 일 학기까지 문과반에 적을 두었다가 집안 어른들의 반대로 2학기에 이과반으로 옮겨서 의과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의사가 되어도 문학을 할 수 있다는 주위의 설득과 자신과의 타협으로 의사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전문의사의 과목 선택 시에도 전문과목 중 가장 문과적인 내과를선택함으로써 그나마 차선의 현실적인 타협점을 찾은 셈이었다. 의사로서의 지식과 경험이 늦깎이 시인으로서의 부족함을 메워 주리라고 믿으며, 사람들에게 감동과 깨우침을 주는 좋은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새삼 다짐을 해 본다. ▩ (p. 146~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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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영_시론 시평 산문집 『줌, 인 앤 아웃』에서/ 2023. 9. 27. <포에트리> 펴냄
* 김세영/ 2007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하늘거미집』『물구나무서다』『강물은 속으로 흐른다』, 서정시 선집『버드나무의 눈빛』, 디카시집『눈과 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