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직도 고웁네 외 1편/ 안영희
아, 직도 고웁네 외 1편
안영희
알아보시겠어요?
건네는 내 인사에
큰 눈을 들어 한참이나 건너다보기만 하던
삼십 년 만에 마주친 그 사람
···아, 직도 고웁네,
그 한마디 더디게 나오기까지 그는 내게서
무엇을 읽고 있었을까?
입동 가까이
어제는 비가 내렸고
나뭇잎들 찢긴 편지처럼 휘날렸네
절정을 치던 광채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는
보문사 긴 담장 나뭇잎 축제의 길을
짠하게 배어오는 애잔함으로 걸었네
그도 읽고 있었을까? 내 얼굴에서
어언 다녀간 비와 바람 서릿발 치고 간 흔적들을
아닌 듯
죽음이 색을 풀어 추연히 스며든
조락의 통증 같은
저 아름다움을
-전문(p. 8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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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어쩌자고
목숨 건 사랑이 불시착했느냐?
신호대기하고 있는 동부고속화도로
진입로 가에
진홍진홍 지인홍··· 꽃구름 레이스
줄 놓치면 죽을까 봐
고개 한 번 돌려보지 못하고
줄줄줄 따라가는 꼭두각시들의 시대를,
열정 제거당한 허허한 저녁나절을
물끄러미 구경하고 있느냐
무엇으로 뭉클뭉클 그리 치명매혹으로 터져 나와서는
삶은 때로 혼절할 듯한 전율이다! 고
오래 커튼 내린 내 마음 잿빛 유리창
차앙! 팔매를 치고 있느냐
절정의 덩굴장미, 장미 안나 카레니나여
-전문(p.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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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목숨 건 사랑이 불시착했다』 에서/ 2023. 10. 31. <서정시학> 펴냄
* 안영희/ 1990년 시집『멀어지는 것은 아름답다』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물빛창』『그늘을 사는 법』『가끔은 문밖에서 바라볼 일이다』『내 마음의 습지』『어쩌자고 제비꽃』, 시선집『영원이 어떻게 꽃 터지는지』, 산문집『슬픔이 익다』, 도예 개인전 <흙과 불로 빚은 詩 (2005년, 경인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