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깔/ 박순원

검지 정숙자 2023. 11. 16. 02:14

 

    깔

 

    박순원

 

 

  깔은 깔이다 깔은 홀로 존재하며 깔깔거리지도 깔짝거리지도 않는다 깔은 깔로 존재할 뿐 고깔도 때깔도 아니다 빛깔이 깔이 되고자 하면 그 빛을 버려야 한다 깔은 아무것도 형용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다 깔은 소리가 되어 나오면 금세 허공에 흩어져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으며 글자가 되어 나와도 아무 의미도 지니지 못하여 어느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다 그것은 칼이 소리나 글자가 되어 이 세상에 나오면 누구나 그 칼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에 쓰이는지 주의 깊게 살필 수밖에 없는 것과 사뭇 다르다 깔은 들리기는 하지만 형체가 없으며 보이기는 하지만 뜻을 알 수가 없어 빗댈 수도 견줄 수도 없다 맥락도 없고 덧붙일 것도 없다

   -전문(p.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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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네르바』 2023-가을(91)호 <신작시> 에서  

  * 박순원/ 2005년『서정시학』으로 등단, 시집『아무나 사랑하지 않겠다』『에르고스테롤』『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