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은 참회 외 1편/ 지하선
너무 늦은 참회 외 1편
지하선
어둠이 스르르 들어오는 흔적을 따라 재봉틀 소리 지나갔다
설빔일까 추석빔일까 명절 그음만 되면 잔뜩 부푸는 9살
어머니는 여러 벌의 새 옷을 지었지만 늘 어디론가 사라졌다
번번이 기대를 깨뜨린 구겨진 희망이 찢어지고 어머니의 여전한
재봉틀 소리 끝자락 어두운 벽에 새 옷이 걸렸을 때 '찌지직 '
저고리의 한 귀퉁이를 찢어버리고 말았다 바르르 떨리는
심장을 부욱 긋고 제 속으로 자지러드는 비명소리, 모르는 척
어스름 저녁을 비집고 벽장 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무량한 적막이 아무렇지도 않게 흐르고 흘러 어느덧 세월이 늦가을로 물들어 갈 즈음 어머니의 꼬깃꼬깃한 시간을 헤집고 나온 생각지도 못했던 진실, 어머니가 늘 짓던 새 옷은 삯바느질이었고 그 옷을 변상해 주느라 빚을 내야 했다는 사실이 긴 한숨으로 새어 나왔을 때는 이미 어머니의 기력은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발설하지 못했던 그 참담한 심통이 어머니의 속앓이에서 끝내는 내 심장 깊이 슬픔으로 곪고 또 곪아 핏줄마저 누런 고통이 흐르고 있었음을 그때는 미처 몰랐었다
기회와 때를 놓친 허물이 허물을 벗지 못한 채
내 시간의 앞면과 뒷면에서 너덜거리고 있었다
-전문(p. 10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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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한 보이스피싱?
온라인으로 세금을 내려고 하니 본인확인을 위한 1원이 입금되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보낸 1원의 입금자 '잠든 수박'
나는 전혀 그를 모르는데, 그는
나의 밖 어디쯤에서 잠들어 있다가
어느새 내 게으름 깊숙이 들어왔을까
서랍 속에서만 뒹굴고 있는 녹슨 동전
통영의 기억에서 지워진 지 오래인 화폐이면서 화폐가 아닌
그 1원
상거래 밖으로 내팽개쳐진 무가치한 존재인 줄 알았는데
호시탐탐 나를 낚으려고 미늘로 드리워져 있었다니
결국 나는 그 미끼에 물려 한 달치 삶 값을 몽땅 낚이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잠든 수박'은 잠든 게 아니었으므로
구르고 굴러 눈덩이처럼 커지면서 나를 삼켜버릴지도 모르는
무궁무진한 미지의 온라인 우주
그 속을 헤매는 나 같은 인간이 어쩌면 그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지는 않을런지
소름 돋는 7월 31일
-전문(p. 124-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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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이때 여자는 왜 눈을 감을까』 에서/ 2023. 10. 13. <미네르바> 펴냄
* 지하선/ 2004년『수필춘추』로 수필 부문 & 2008년『미네르바』로 시 부문 등단, 시집『소리를 키우는 침묵』『미지의 하루에 불시착하다』『잠을 굽다』『그 잠의 스위치』